“아주 어릴 때부터 맘속 깊이 지녔던 꿈이 있었어요. 옷이라는 꿈. 옷을 생각하면 마냥 두근거리고 설레는. 내가 입은 옷들이 트렌드가 돼 불티나게 팔리고, 외국 사이트에 내 사진이 실리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니 조금은 낯 뜨겁네요. 하지만 너무 어렵고 추상적인 말로 꿈을 포장하고 싶진 않아요. 좀 촌스럽고 부끄럽더라도 쉽고 담백하게 표현하렵니다).”
‘스트리트 패셔니스타’라 불리며 최근 패션계의 ‘핫 걸’ 로 떠오른 방송인 김나영 씨가 22일 기자에게 보낸 e메일의 한 대목이다. 솔직하면서도 야심 찬 그의 속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한 다음, 그는 “인터뷰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 것 같아 블로그에 썼던 내용을 포함해 몇 가지를 적어 봤다”며 이 e메일을 보내왔다.
해외 패션쇼장 앞에서 찍힌 사진이 전 세계 패션매체 및 블로그에 오르내리면서 단숨에 ‘스트리트 패셔니스타’로 등극한 김 씨.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쳤을 때 가장 먼저 뜨는 연관검색어는 이제 ‘패션’이다.
해외 컬렉션에 운집한 카메라 앞에서 패션을 뽐낸 그의 모습은 보그닷컴, WWD, 하퍼스바자 등 세계적인 패션 매체들의 온라인 사이트에 ‘화제의 사진’으로 실렸다. 지난달 열린 2014년 파리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존갈리아노 클로에 빅터앤롤프 등 럭셔리 브랜드의 패션쇼에 정식으로 초청받기도 했다. 국내 SPA(제조유통일괄형) 브랜드 ‘에잇세컨즈’ 모델로도 발탁된 그는 “꿈같은 일들이 하나 둘 실현되니 황홀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
김 씨가 패셔니스타로 떠오른 ‘사건’은 패션과 관련한 소비자들의 기호와 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한다. 대부호의 상속녀나 슈퍼스타보다 ‘옷 잘 입는 옆집 언니’ 같은 롤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취향, 그리고 패션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과감하게 즐기는 모습에 박수 칠 수 있는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이런 변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에게 A style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시나브로 찾아온 추위 속에서 멋스러움을 지킬 수 있는 거리패션 스타일을 듣기 위해. 나라라도 구할 태세로 진지하게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던 김 씨는 신중한 표정으로 몇 가지 스타일을 제안했다.
▼ 셔츠 점퍼 코트 겹치는 레이어드 룩으로 변신 또 변신 ▼ 김나영과의 패션 수다
김나영 씨와의 촬영이 진행된 2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 김 씨는 커다란 쇼핑백 한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본인이 평소 즐겨 입는 패션 아이템으로 ‘리얼’한 스트리트 패션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인근 가로수길에서 진행된 촬영 장소에는 어느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늘씬하고 얼굴이 작아서 ‘옷발’이 정말 잘 받는다”라며 수군대는 사람들 중 누군가 “언니, 예뻐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었을까. 가을 햇빛 속에서 김 씨가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었다. 예쁜 옷을 입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걸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 데뷔 10년 차인데 옷을 잘 입는다는 이미지는 최근에야 갖게 된 것 같아요.
“작년부터예요. 한 케이블 방송에서 ‘스트리트 패션 퀸’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을 찍을 일이 있었어요. 프로그램 기획서를 보고 ‘내 운명이구나’ 싶어 무릎을 쳤죠. 원래 옷을 무척 좋아했어요. 강원 춘천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가끔 서울 문정동 로데오거리 같은 데로 ‘원정 쇼핑’을 올 정도였으니까요. 소풍 가기 전날엔 소풍 당일 입을 옷을 시뮬레이션해 보기도 했어요.
10년간 방송을 하면서 그때그때 순간에 충실하게 일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좀 엉뚱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로 굳어졌더라고요. 물론 이런 모습들, 다 제가 좋아하는 제 모습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저한텐 분명 다른 모습도 있는데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이미지로만 생각할까봐 두렵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예능인’에게 옷 협찬을 해주려는 브랜드는 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사 입었죠. 패션에 대한 갈증에 늘 시달리던 중 ‘푸시버튼’의 디자이너 박승건 씨와 친해지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 직접 다 구입하려면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케이블TV의 비디오자키(VJ)로 방송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엔 동대문 시장 옷을 사서 이리저리 스타일링해 입었어요. 옷을 다 사입다 보니 너무 많아져서 화장실까지 옷 수납공간으로 써야 했죠. 샤워커튼을 거는 자리에 옷을 매달아놨는데 너무 무거워서 아래로 휜 모습이, (옷 사느라) 휜 제 등골 같기도 하고, 하하.”
― 연예인이 이미지를 확 바꾸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불과 1년여 만에 색다른 이미지로 재탄생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주위 반응은 어떤가요.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 말투가 ‘옆집 소녀’처럼 어리게 느껴지다 보니 ‘패셔너블’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때로는 좀 성숙하게 말할 수 있게 발성수업까지 받았어요. 주변에선 제 변신을 멋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질투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요.”
― 해외 컬렉션에 초청받아 글로벌 패션세계를 엿본 소감이 어떤가요.
“프랑스 보그의 전 편집장인 카린 로이펠트나 이탈리아, 일본의 보그에서 일한 안나 델로 루소 등 패션계 거물들을 직접 만나니 정말 신기했어요. 패션쇼 스트리트 패션으로 이미 한 번 화제가 돼서인지 ‘당신을 본 적이 있다’며 반겨줘 그저 황송했죠.”
― 예쁜 옷이 많을 것 같은데 쇼핑 노하우가 따로 있나요.
“되도록 싸게, 경제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부산 국제시장은 빈티지(구제) 아이템의 보고예요. 제게 패션 조언을 주시는 분들과 함께 부산에 여행을 가면 바다는 딱 3분만 구경하고 바로 국제시장으로 가요. 멀쩡한 빈티지 티셔츠가 1만 원인데 어떻게 그 매력을 거부하겠어요. 홍콩 세일 기간에 맞춰 해외에 가서 쇼핑하기도 하고, 아웃렛도 자주 이용해요. ‘10꼬르소 꼬모’나 ‘비이커’ 같은 편집 매장도 자주 가요. 이번 촬영 때 제가 메고 온 ‘톰 브라운’ 백은 ‘10꼬르소 꼬모’에서 산 건데 세 번이나 매장에 찾아가 망설인 끝에 구입했어요. ‘에잇세컨즈’도 평소 자주 가는데, 남자 옷도 참 예쁜 것 같아요. 키가 큰 편(170cm)이라서 남자 옷도 잘 어울리는 편인데 팬츠나 오버사이즈 카디건 같은 게 참 예뻐요. 양말 벨트 같은 건 옷을 잘 입기 위한 필수 아이템인데 이런 것도 여기서 많이 구입해요.”
― 좀 거창한 질문이긴 한데 ‘패션 철학’이 있다면….
“음, 그냥 예쁘면 돼요. ‘런 웨이’가 아니라 ‘리얼 웨이’에서 패션을 즐기는 모습 때문에 제가 관심을 받게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옷을 실험적으로 즐기는 게 재밌어요. 그게 철학이라면 철학이에요.”
― 좋아하는 해외 디자이너가 있나요.
“비비언 웨스트우드, 톰 브라운을 좋아해요. 특히 ‘톰 브라운’의 남자 옷 중 예쁜 게 참 많아요. 쇼핑 팁을 하나 드리자면 홍콩이나 국내 아웃렛에서 이 브랜드의 팬츠를 노려보세요. 남성 기준으로는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아웃렛 재고로 남았지만 디자인이 훌륭한 옷이 많거든요.”
― 아직 한국에선 패션을 사치로 보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을 충분히 이해해요. 사실 예쁜 옷, 좋은 옷 사는데 저 스스로도 돈 많이 썼으니까. 하지만 이걸 ‘돈 낭비’라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투자’가 아닐까 해요. 패션은 누구에게나 경쟁력, 즉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패션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줘요. 생각, 삶의 방식, 하는 일, 심지어는 만나는 이성의 스타일, 음악까지…. ‘취향의 집합체’거든요. 너무 무리하는 건 삼가야겠지만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건 사실이잖아요.”
인터뷰 말미에 김 씨는 자신의 패션 블로그(blog.naver.com/underandover)를 꼭 방문해 달라고 당부했다. “블로그 이름이 ‘언더 앤드 오버’인데, ‘언더’에 있는 애가 ‘오버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실 거예요.” 패션 얘기를 하다 진지해진 모습이 스스로 어색했는지 그는 결국 ‘개그 본능’을 감추지 못했다. 패션과 예능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글=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사진= 김도훈 포토그래퍼(김팀 스튜디오) kimtim.com@gmail.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