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PC통신 동아리 멤버들은 금요일 정기 채팅 방을 ‘자폐 방’이라고 불렀다. 분명 함께 모여 떠들었지만 언제나 저마다의 이야기로 조각조각 흩어졌다. 일상의 대화가 어쩌면 대개 그렇다. 소설이나 TV드라마 속 대화와 다르다. 뚜렷한 호응을 맺으며 흘러가지 못하기 일쑤다.
26일 막을 올린 연극 ‘바냐아저씨’의 무대는 그 채팅 방을 닮았다. 등장인물 9명이 제각각 분주하다. 시선은 대화의 흐름과 무관하게 이리저리 쪼개진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기보다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다. 매부의 명망을 삶의 낙으로 여기고 살아온 영지 관리인 바냐의 신세한탄, 은퇴하고 젊은 새 부인 엘레나와 함께 영지로 찾아온 매부 세례브랴코프의 신세한탄,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 가냘픈 자존감을 세우려 하는 엘레나의 신세한탄.
‘바냐아저씨’는 ‘벚꽃동산’ ‘세 자매’ ‘갈매기’와 함께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명망에 대한 경외감을 시선에서 치워낸 관객에게 이 공연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무대는 훌륭하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은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운 공간이다. 살아있는 듯한 고목 한 그루를 우뚝 세워둔 배경 앞으로 살짝 비틀어 세운 고즈넉한 정원과 거실이 번갈아 미끄러져 나온다. 낙엽 냄새 품은 바람이 훅 불어나올 듯한 풍경이다.
컨디션 나쁜 날이었을까. 27일 오후 배우들이 내놓은 대사는 낙엽처럼 무대 위를 힘없이 굴러다녔다. 어긋나게 맞물리는 일상의 대화를 보여주려 한 작가의 의도라 보기 어려웠다. 이야기의 불안감보다 입에 온전히 붙지 않은 채 나열되는 대사들로 인한 불안감이 더 컸다.
고전은 응당 존중받을 까닭이 있다. 그러나 114년 전 쓰인 글을 무대 위에 다시 풀어내는 작업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가치를 제외한 다른 까닭이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고통이 연민 속에 잠겨 가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결말부 바냐의 조카 소냐의 대사는 그저 설익은 감상의 한탄으로 들린다. 그런 불쾌감 역시 연출의 의도였을지. 갸우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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