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방의 ‘은행나무아미타불’에서 그렇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나무보살이다. 나이는 잊은 지 오래. 1100세인가. 1500세인가. 저잣거리 중생들은 은행나무 법랍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이 잦다. 요즘 평일에도 5000여 명, 휴일엔 1만5000여 명의 중생이 은행나무 보살을 ‘뵈러’ 온다. 누구는 신라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금강산 가던 길에 심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 뿌리가 내렸다고도 한다.
기껏 100년도 살까 말까 한 인간들의 마음이 이런 전설을 자아냈으리라. 신령스러운 나무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일 것이다. 고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 큰 가지가 부러졌다거나,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도끼날을 들이댔을 때 느닷없이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쳤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도끼 자국은 지금도 남아 있다.
키 42m, 가슴둘레 14m의 당당한 체구. 암컷나무이지만 헌헌대장부처럼 잘생겼다. 당연히 천연기념물(제30호)이다. 나뭇가지도 동서 28.1m, 남북 28.4m로 알맞게 드리웠다. 그만큼 뿌리도 땅속에 깊고 넓게 박고 있다. 은행나무는 용문산(1157m)의 한가운데에 떠억 하니 가부좌를 틀고 있다. 천하의 명당 자리다. 용문산 산봉우리들은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용문사 대웅전의 석가모니 부처와 은행나무 보살은 정면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은행나무 보살을 보고 웃고, 은행나무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를 보고 웃는다. 은행나무는 금방이라도 크르릉! 용이 포효하며 승천하는 형상이다. 영락없이 황룡이 꿈틀꿈틀 하늘로 요동치며 올라가는 모습이다. 기운이 쩌렁쩌렁하다. 장엄하고 웅장하다. 아래 밑둥치엔 우툴두툴 부스럼 딱지 같은 게 솟아 있다. 공기 중에서 숨을 쉬는 공기주머니 ‘유주(乳柱)’다. 늙은 은행나무에 흔한 일종의 ‘기근(氣根)’이다.
양평은 ‘양근(楊根)’과 ‘지평(砥平)’이 합쳐진 고을이다. ‘낮고 평평한 버드나무 고을’이란 뜻이다. 물이 많아 버드나무가 잘 자란다.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 가로수가 흔하다. 두물머리, 세미원, 남한강 자전거길, 용문산, 수상스키, 패러글라이딩, 산악오토바이…. 곳곳이 절경이요, 놀자! 쉬자! 천국이다. 오죽하면 최근 ‘쉬쉬놀놀 양평공화국’으로까지 선포했을까. 마침 양평은 여주, 가평, 충주, 청송, 서산, 진도, 남이섬, 양구, 서울 강남, 광진, 인천 서구 등 12개 고을이 만든 상상나라연합국의 하나이다. 정말 나흘 놀고 쉬고, 사흘만 일하며 사는 세상이 올까.
용문산 봉우리 중엔 함왕봉과 함왕성터 함왕굴이 눈길을 끈다. 중국에서 건너온 강릉 함씨(咸氏) 시조 함왕(咸王)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그 아래 사나사(舍那寺) 절 마당에 함씨각(咸氏閣)이 있는 이유다. 함씨각엔 함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용문산 은행나무는 양평의 정신적 기둥이다. 양평의 주산 용문산 아래 중심을 잡고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 천년이 훨씬 넘게 눈을 지그시 감고 묵언수행 중이다. 봄이 오면 여린 연두잎을 말없이 틔워낸다. 가을엔 샛노란 은행잎을 온몸에 그렁그렁 매단다. 그리고 바람 불고 서리 내리면 우수수 한순간에 털어버린다. 그렇다. 그건 침묵의 소리다. 온몸으로 토해내는 천둥소리다. 몸짓으로 보여주는 염화시중의 미소다. 용문산 은행나무는 천년 나무보살이다. 황금옷의 나무성자다. 용문산 은행나무아미타불!
‘나무가 말하였네/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어쩌다 닿기 위해서’(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에서)
▼ ‘해우소 거름’ 은행나무 뿌리가 몽땅 빨아들여요▼ 용문사 주지 호산스님
“용문산 은행나무는 참으로 신령스러운 나무입니다. 우리 절은 세 번이나 불탔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그랬고, 1907년 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이 또 불태웠지요. 1950년 6·25전쟁 땐 이곳이 바로 격전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은행나무만큼은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꿋꿋하게 서있습니다.”
호산(虎山·47·사진) 스님의 얼굴은 해맑다. 10대 때 용문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서 출가했다. 용문사 주지 소임은 올해로 7년째. 절집 곳곳이 온통 꽃밭일 정도로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눈에 거슬리는 전기, 전화선도 모두 땅 밑으로 지나도록 했다. 은행나무 옆 거대한 피뢰침(약 55m)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건 ‘나무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천살을 훌쩍 넘은 은행나무가 어찌나 생명력이 왕성한지 놀라울 지경입니다. 20여 m 떨어진 ‘푸세식’ 해우소를 2003년 이후 한 번도 치우지 않았는데, 그것은 은행나무 뿌리가 거름으로 모두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나서 수세식 해우소로 바꾸고 싶어도 못 바꾸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땅 밑에 콘크리트 공사를 하면 더이상 뿌리가 못 빨아들이니까요. 은행알도 해마다 많게는 7∼8가마까지 거둡니다.”
주지산 용문사 사무장에 따르면 ‘은행나무가 하루 아래계곡과 땅속에서 빨아들이는 수분의 양이 무려 80드럼(1드럼 200L·총 16t)쯤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해마다 음력 삼월삼짇날엔 늙은 뿌리에 막걸리 20말(400L) 정도를 부어준다’고 귀띔한다.
용문산 은행나무는 그 어떤 젊은 나무보다 튼튼하다. 그래서 단풍도 가장 늦게 든다. 매년 10월 말일이면 어김없이 샛노랗게 물들었지만, 올해는 5일쯤 늦었다. 그러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하루 이틀 만에 모조리 져버린다. 주변 젊은 은행나무는 이미 “우수수!” 노란 은행잎 비를 내리며 옷을 벗고 있다.
“주말마다 우리 절에 70∼100명에 가까운 분들이 템플스테이를 하러 옵니다. 올해만 벌써 5000명이 넘었습니다. 참가자 중 불자는 15%도 안 됩니다. 그분들은 바로 은행나무를 비롯한 용문산 자연과 교감을 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들으러 오시는 거지요. 젊은 분들이 70%, 그중에서도 여성이 70%가 넘는데, 그만큼 요즘 젊은 사람들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어디 마땅히 머리 식힐 곳이 없는 거지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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