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연애는 온전히 아름답기가 쉽지 않다. 연극 ‘다정도 병인 양하여’의 매력은, 결코 아름다웠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연애의 기억을 밉지 않은 모양새로 풀어낸 영리한 재치에서 나온다.
5일 밤 일본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이 작품을 관람한 대학생 요시무라 사야 씨(23)는 “독특한 연애 이야기를 생경한 스타일로 빚어냈다. 여러 번 깜짝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한중일 3국 합동 연극축제인 제20회 베세토연극제에 초청된 ‘다정도…’의 객석을 가득 메운 일본인 관객 350여 명의 얼굴에는 달콤쌉싸름했던 연애의 기억을 몰래 되씹는 듯한 진지함이 흘렀다. 6일 오전 만난 성기웅 연출(39)은 “일본 관객들이 조용하고 호응이 적으니 신경 쓰지 말고 하라는 조언을 듣고 왔는데, 예상보다 고무적인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적 일상에 익숙해야 눈치 챌 수 있는 코미디 요소에 족족 때맞춰 웃음이 터지더라.
“약간 놀랐다. 많이 웃기는 게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문화 차이가 있으니 쉽지 않은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다. 젊은층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해 한국적 유머 코드에도 어색함이 덜한 것 아닐까 싶다.”
―주인공 ‘성기웅’이 여러 남자와 동시에 연애하기를 즐기는 ‘다정’이라는 여인과 함께했던 시간을 되짚는 이야기다. 다정을 2명의 배우로 분리한 까닭이 뭔가.(이날 만난 마키코 이시다라는 관객은 “일본에서 보지 못한 스타일이라 흥미로웠지만 연출이 전달하려는 바를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왜 연극을 하는 걸까. 그 고민은 ‘연극으로만 할 수 있는 게 뭘까’라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연극은 사실적 표현이 어려운 장르다. 영화처럼 비가 오게 할 수도, 연기자의 다양한 심리를 빠르게 교차해 보여줄 수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표현의 제약과 그에 따른 연극적 약속을 이해한다. 그걸 믿고 이용하는 거다. 실제를 흉내 내기보다 관객이 나름의 해석으로 채울 부분을 만들고 그 폭을 조율한다. 한 인물을 두 배우로 분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 성기웅이 실제 성기웅과 얼마나 겹치는가도 관객을 고민하게 만든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는 일상적 리얼리티에서 벗어난 표현이 싫었다. 그런데 무대 경험을 쌓다 보니 리얼리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더라.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연극적 변형 아닐까. 이 연극이 실제 성기웅의 이야기인지는 관객의 재미를 위해 밝히지 않는 편이 좋다. 12월 서울 국립극단 재공연을 마치고 기회가 닿으면 말하겠다.”
―매사 집요하고 소심한 주인공의 성향은 ‘진짜 성기웅’에게서 가져온 건가.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편이었다. 다정처럼 주장 강하고 약간 못되게 구는 여자. 경험담인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디선가 실제로 벌어진 연애 이야기가 재료인 건 틀림없다.”
―지금도 나쁜 여자 좋아하나.
“하하. 그 취향, 버리려 한다. 어머니께서 내 연극 중 유일하게 안 보신 작품인데, 뭐라 하실지 궁금하다.”
―연극을 매개로 한 국제 교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히라타 오리자 베세토 국제위원장의 ‘과학하는 마음’을 2011년 번역해 서울에서 연출했다. 그가 어제 저녁자리에서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를 소재로 한 공동제작 작품을 유럽 무대에 소개하겠다’고 하더라. 정치적 뉴스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협업이 연극인들 사이에서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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