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주먹도끼와 닮은 다이아… 우연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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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디자인/박현택 지음/311쪽·1만5000원/컬처그라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석기 주먹도끼와 1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은 형태가 비슷하다. 자연석을 가공했다는 점에선 같지만 전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제 역할에 알맞게 쪼개지고 연마됐으며 후자는 호사스러운 취미에 맞춰 섬세한 커팅과 연마의 세공 과정을 거쳤다. 디자인의 본질은 둘 중 어디에 맞춰져야 할까. 컬처그라퍼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석기 주먹도끼와 1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은 형태가 비슷하다. 자연석을 가공했다는 점에선 같지만 전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제 역할에 알맞게 쪼개지고 연마됐으며 후자는 호사스러운 취미에 맞춰 섬세한 커팅과 연마의 세공 과정을 거쳤다. 디자인의 본질은 둘 중 어디에 맞춰져야 할까. 컬처그라퍼 제공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영화 ‘짝패’에 나오는 이 대사를 살짝 비틀면 이 책과 공명할 법하다. “예술성 뛰어나다고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디자인이 예술적인 거다.”

저자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박물관에서 20년간 디자인 업무를 맡은 공무원이다. 그러면서 디자인은 뭔가 참신하고 획기적이고 도회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세상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게 됐다. 그리고 오래된 것 또는 오래 지속되는 것에 디자인의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20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쓴 주먹도끼의 형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싸다는 1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빼닮았다. 호랑이 새끼를 닮았다고 호자(虎子)란 이름이 붙은 백제시대 남성용 요강은 마르셀 뒤샹이 예술을 풍자하기 위해 변기를 예술품으로 둔갑시킨 ‘샘’과 비교했을 때 훨씬 실용적이면서도 해학적이지 않은가.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프라다 구치 같은 유럽 유명 브랜드 가방에 비해 한국의 보자기야말로 얼마나 다목적 전천후 휴대장비인가.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예술가입네 하는 작가들의 작품보다 소박하지만 삶의 구석에서 빛을 발하는 공예품이 더 긴 생명력을 지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새롭고 기발한 예술보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깊이 뿌리박은 일상의 승리다.

이는 예술과 학문의 합일을 추구하며 수도승처럼 살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예서 대련(對聯) 작품 중 최후 걸작으로 꼽히는 ‘대팽고회(大烹高會)’의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위대한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최고의 만남은 부부 아들 딸 손자 손녀/이것이 촌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라/비록 허리춤에 커다란 황금인장을 차고/밥상 앞에 수백 명의 여인이 시중든다 한들/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을 촌늙은이라고 낮춰 부르면서 ‘최고의 음식은 두부고 최고의 시간은 가족과 함께할 때’라는 깨침을 읊은 한시다. 조선 문예의 중심이라 자부하며 세상을 호령했던 추사도 생을 마감할 때서야 깨달은 것은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위대함이었다.

저자의 이런 탐구는 6·25전쟁 때 국방군의 철모를 절구통으로 삼고 뇌관을 뽑은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을 절굿공이로 썼던 사진에서 빛을 발한다. “살상용으로밖에 쓸 수 없는 화기를 비살상용 도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죽음의 도구를 삶의 도구, 즉 ‘살이’의 도구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삶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디자인은 바로 그런 삶을 더 의미 있게 이끌어 가는 방편이 되어야 한다. 저자가 인용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1870∼1933)의 말이 이를 웅변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의자가 아니라 가장 좋은 의자이다. 더 좋은 의자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리고 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오래된 디자인#예술#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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