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정체성 8년간 추적분석… 전문가 38명이 38가지 주제로 쉽게 풀어내
◇한국인은 누구인가/김문조 외 공저/564쪽·2만8000원/21세기북스
한국인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일중독이다. 유승호 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교수는 일중독이 스스로 어떤 일을 선택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무엇에 의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와 구속’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일에 몰입된 ‘일에의 중독’은 긍정적으로 보지만 ‘일로부터의 중독’은 몸과 마음을 파괴한다고 경계한다.
직장 동료에게 건네는 “수고하세요”란 인사도 한국인만 쓴단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쉬엄쉬엄하라는 말로 “Take it easy”라고 한다. 한국에서 “놀고 있네”라는 말은 비꼬는 말이다. 놀려면 숨어서 놀아야 한다. 일중독을 권하는 사회란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연간 노동시간은 가장 긴 반면 노동생산성은 낮은 편에 속한다는 통계는 식상하다. 유 교수는 딱 두 문장으로 일중독의 심각성을 진단한다. “많은 남자들이 발기불능이나 조루로 괴로워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경제력을 잃은 남성 중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끼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절망으로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살을 시도한다.”
2005년부터 한국인의 정체성을 연구해온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는 연구 결과물을 총정리하는 목적으로 책을 기획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가 편집위원장을 맡아 각 분야 자문위원들과 함께 38가지 주제와 그에 맞는 필자를 선정했다. 해당 분야 전문가인 교수들은 일반 독자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교양도서 수준으로 글을 썼다. 분량도 주제당 A4용지 5∼10장으로 길지 않다.
책은 오늘날 한국인의 물음에도 답한다. ‘자식에 대해 부모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나’라는 물음에는 황매향 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가 답했다. 그는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이 혼재돼 부모의 자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일하는 어머니도 가사를 자식과 나누지 않으니 “엄마가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게 편해서 시집은 천천히 갈 거야”라는 말이 나오고, ‘돈 버는 기계’로 여겨지게 돼버린 아버지는 그 기능을 잃는 순간 무능한 아버지로 전락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산단다.
김계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공무원 직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분석하며 “선수는 자녀이지 부모가 아니다. 선수는 코치나 캐디의 조언을 참고는 하되, 항상 그대로 따르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인생을 거는 직업이라는 종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조언한다.
38가지 주제를 모자이크로 이어붙이면 한국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호영 아주대 의대 명예교수는 한국인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는 부끄러움을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근본이라고 봤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해야 하는 오늘날에는 이런 염치를 아는 자세가 홀대받고 있다고 분석한다. 염치가 없는 것은 애나 어른을 가리지 않는다. 어른들은 자기 이미지를 높이려고 부끄럽고 창피한 행동도 불사하고, 애들은 집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병적인 자기애를 키우며 자라고 있다.
편집위원장을 맡은 김문조 교수는 ‘다채로운 마음의 지도’ 속에서 3가지 큰 축으로 한국인을 정의한다. △‘끼리끼리’ 관계주의 △‘빨리빨리’ 현세주의 △‘다다익선’ 배상(賠償)주의. 이를 종합하면 ‘친한 사람들끼리 한평생 만복을 원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 밑바탕에는 안락한 삶을 향한 지복(至福)의식이 내재돼 있단다.
권력, 공감, 지역감정, 출산, 결혼, 죽음, 일, 종교, 행복, 사교육, 외모지상주의까지 다루지 않은 주제가 없다. 최신 통계와 사례, 그리고 저자의 식견이 담긴 분석과 비판을 담아 책의 짜임새가 조밀하다. 책을 읽으면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는 것 같다.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에 알쏭달쏭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그래도 한참을 들여다보면 정체성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이는 찰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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