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맑음. 클리셰.
#82 Stone Temple Pilots ‘Ride the Clich´e’ (1996년)
내가 처음 작곡 비슷한 걸 한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때 난 동경하던 외국 그룹 S와 K를 ‘레퍼런스(참고)’로 삼았다. 아아, 난 정말 재능이 부족했다.
요즘 표절 논란이 유별나다. 아이유의 ‘분홍신’부터 거머리(박명수, 프라이머리)의 ‘아이 갓 시’, 박지윤의 ‘미스터리’까지. 좀 지겨울 정도다. 심지어 고인인 김현식까지 유작 ‘나루터에 비 내리면’으로 비슷한 입방아에 올랐으니까.
논란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는 “이건 표절이 아니다. 너희들이 음악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건 레퍼런스나 클리셰라고 하는 거야”라는 항변이다. 용어부터 어렵다. 레퍼런스는 대중음악계의 오랜 관행이다. 해외 팝에서 듣기 좋은 특정한 편곡이나 화성 전개 방식을 따온 뒤 멜로디나 흐름을 바꿔 새로운 곡을 만드는 거다. 클리셰는 특정 장르에서 반복해 쓰이는 멜로디나 화성, 리듬 패턴이다.
음악 좀 안다는 사람들은 “‘분홍신’은 전형적인 스윙 재즈의 클리셰로 된 곡이야. 너희가 음악을 잘 모르니 스윙 재즈라는 것도 안 들어봤을 텐데 말야”란 식으로 대중을 내려다본다. 근데 대중이 ‘분홍신’을 넥타의 ‘히어스 어스’와 비슷하다고 직관적으로 느끼는 데는 그만한 구조적 이유가 더 있을 거다. 좀더 친절한 설명은 없을까.
‘미스터리’와 ‘아이 갓 시’가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곡을 부른 네덜란드 가수 카로 에메랄트는 논란 덕에 한국에서 떴다. 음반 수입사 사람은 “물량이 달려 추가 주문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난 에메랄트의 곡보다 ‘미스터리’나 ‘아이 갓 시’가, ‘히어스 어스’보다 ‘분홍신’이 더 좋다. 귀에 감기는 한국말이 좋고 드라마틱한 멜로디와 구성이 더 좋다.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 잇츠 트루’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훨씬 더 좋은 것처럼.
‘표절이냐, 아니냐!’ 이런 소동의 검은 숲에서 알밤 한 톨처럼 톡 떨어져 뒹구는 화두 하나. 그건 레퍼런스도 클리셰도 없는, 정말 새로운 음악은 어디 없나 하는 호기 어린 의문. 나처럼 닳고 닳은 어른들, 매일의 전투에서 결과물과 수익을 내야 하는 작곡가, 직장인, 생활인에겐 배부른 얘기인 걸까. 그런 창의적 반란을 일으킬 시간이나 여유.
근데 이제 막 악기를 들고 펜을 잡기 시작한 당신들은 다르잖아. 어른들만 흉내 내다 어른 될래? 너흴 믿는다, 겁도 없는 꼬맹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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