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잎처럼 사각사각… 맨해튼의 ‘심수봉’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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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음반 ‘슬리프리스 나이트’ 낸 뉴욕의 싱어송라이터 희영

싱어송라이터 희영은 “2011년 자비로 제작한 첫 앨범을 한국과 미국의 음반사에 보냈는데 파스텔뮤직과 연을 맺게 됐다. 내년에는 2집을 미국에서도 내고 싶다”고 했다. 파스텔뮤직 제공
싱어송라이터 희영은 “2011년 자비로 제작한 첫 앨범을 한국과 미국의 음반사에 보냈는데 파스텔뮤직과 연을 맺게 됐다. 내년에는 2집을 미국에서도 내고 싶다”고 했다. 파스텔뮤직 제공
싱어송라이터 희영(본명 강희영·28·영어명 Hee Young)이 20일 낸 2집 음반 ‘슬리프리스 나이트’가 올 7월 미국 동부를 뒤덮은 폭염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믿기 힘들다.

마른 잎처럼 사각대는 12곡은 영어로 돼 있지만 꼭 한국 겨울의 사운드트랙 같다. 첫 곡 ‘인투이션’부터 ‘위스키 투 티’ ‘쇼 미 왓 유브 갓’ ‘해피 뉴 이어’ ‘슬로 댄스 송’까지 기타나 피아노, 첼로에 싸여 두 줄기, 세 줄기로 감겨 나오는 희영의 부서질 듯 가녀린 목소리는 짝사랑이나 소외감을 주로 담은 시적인 가사와 유려한 멜로디, 소박한 편곡과 어우러진다. 슬픈 노래를 잔뜩 부르다 요절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1969∼2003)나 여성 가수 주얼의 초창기를 떠오르게도 한다.

이름도 그저 ‘희영’이라는 그가 한국 음악인인지 미국 음악인인지 도통 헷갈린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살며 활동하지만 음반은 한국의 인디 레이블(파스텔뮤직)에서 냈다. ‘한국 음악인이냐, 미국 음악인이냐’고 물었더니 희영이 “그런 건 없는 것 같다”고 빙긋 웃는다. 재작년엔 한 달, 지난해엔 두 달간 한국에 있었고 이번엔 석 달쯤 머물겠다고 했다. 물론 희영은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 한다.

서울 세화여고 1학년 때 희영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홉 살 때부터 동요와 동시를 짓던 공부벌레의 꿈은 미국 명문대학에 들어간 다음 음악이든 시 쓰기든 해보겠다는 거였다. 방송음악가인 아버지, 무명 가수였던 어머니가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희영이 홀로 닿은 곳은 대도시가 아닌, 남부 조지아 주의 티프턴. 목화밭에 둘러싸인 외딴 시골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주인 내외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TV도 어린이 전문 채널만 틀어놨고, 이웃집은 걸어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는데 제겐 운전면허도 없었죠. 그 집의 유일한 놀 거리인 피아노를 뚱땅대면서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영어 수업 내용을 녹음해 복습하려고 가져갔던 어학용 녹음기에 제 연주를 담아보기 시작했어요.”

슬픈 곡들이 나왔다. 사춘기였고 외로웠으니까. 짝사랑 얘기가 많았다. 노래가 쌓여갔고 희영은 진로를 일찌감치 틀었다. 뉴욕주립대 퍼처스 칼리지 스튜디오 작곡과에 입학했다.

평소 흠모하던 닐 영(캐나다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의 딸 같은 분위기의 ‘희 영’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맨해튼, 브루클린의 작은 카페나 바에서 통기타 한 대 둘러메고 자기 노래를 불렀다. 동양적인 목소리에 미국 남부 억양이 섞여든 쓸쓸하고 특이한 희영의 노래에 끌린 음악 친구들이 모였다. 솔 사이먼 맥윌리엄스, 레이먼드 시컴 3세 같은 현지의 젊은 베테랑들이 희영 곁으로 와 콘서트와 음반 제작을 도왔다.

2011년 미니앨범 ‘소 서든’, 2012년 1집 ‘포 러브’를 지휘한 맥윌리엄스 대신 희영은 2집에서 직접 프로듀서를 맡았다. 노래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거친 질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뉴욕 외곽의 헛간, 목조 교회 예배당을 전전하며 녹음했다. “음반을 듣는 사람에게 장소도 들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곳의 공기가 제 생각과 감정에 깃들고 그게 다시 연주나 노래로 발산되니까요.”

희영은 적잖은 잠재력을 지녔지만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무명 음악인이다.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남아공에서든 제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다면 족해요. 한국에 살았다면 저처럼 여린 목소리를 지닌 심수봉 아줌마 같은 음악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분 음악이 정말 좋아요. 아, 언젠가 꼭 한 무대에 서보고 싶네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싱어송라이터#희영#슬리프리스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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