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 교수 “몽롱하게 취한 조선… 하루 아편 판매량 3만명분 달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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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 부산외국어대 교수 ‘개항기 조선의 아편 확산’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촌에서 조선인이 양귀비의 유액을 채취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아편 생산지로 이용했고 그 아편을 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사진 출처 조선총독부 전매국 편 ‘조선전매’(1941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촌에서 조선인이 양귀비의 유액을 채취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아편 생산지로 이용했고 그 아편을 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사진 출처 조선총독부 전매국 편 ‘조선전매’(1941년)
“한성시내에서 아편을 판매하는 곳이 43, 44곳이 되고, 1일 판매하는 양으로 1인 1일 흡연량을 계산해보면 무려 3만 인이 된다. …아편을 입 근처에 갖다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그 사람은 살아도 죽은 사람이다.”

1901년 8월 12일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의 일부다. 당시 한성에서 하루에 팔리는 아편의 양이 3만 명분에 달할 정도로 조선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박강 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에 실은 논문 ‘개항기(1876∼1910) 조선의 아편 소비와 확산’에서 밝힌 내용이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아편전쟁(1840∼1842)을 전후해 중국 아편 문제의 심각성을 접했고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조선에 아편이 유입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선은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그럼에도 1882년 조선과 청나라 간에 무역이 본격화되고 많은 청 상인이 조선에 머무르자 아편 유입을 막을 수 없게 됐다.

조선 정부는 1894년 아편연 금계(禁戒) 조례를 제정해 위반자를 2년 이상, 3년 이하의 감금에 처했다. 그러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1905년 형법대전을 반포해 아편을 수입 제조 판매 흡연한 자를 모두 징역 15년에 처하며 처벌을 강화했다. 1908년 5∼12월 내부 위생국에서 적발한 아편 흡연자는 전국적으로 1676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중국과 국경을 접한 평안도의 흡연자가 1399명(83%)으로 가장 많았다.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 발표된 아편 흡연자는 조선인과 국내에 거주하는 청나라 사람을 포함해 3만5730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속 결과이므로 실제 아편 흡연자는 이를 훨씬 웃돌 것이라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황성신문이 1901년 5월부터 1년 5개월간 아편중독 치료약 광고를 며칠 간격으로 연속해서 실은 것도 당시 아편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조선인들이 아편을 흡연한 동기는 중국 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개 질병 치료가 목적이었다. 쾌락을 위해 아편에 손을 대는 이도 점점 늘었다. 청나라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심리도 아편 확산을 부추겼다. 1898년 7월 30일 독립신문은 “지금은 아편연같이 독한 물건을 경향 간에(서울과 지방을 아울러) 먹는 사람이 많다하니 청국에 폐단 되는 것을 보면서도 이 버릇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항상 남의 속국 노릇 하던 비루한 기상으로 청국 사람이 하는 일은 좋은 줄만 알고 배우는 모양이니 가련한 인생들이로다”라고 썼다. 아편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기 위한 음독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1907년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자 이에 항거해 이규응 역시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아편 생산지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1914∼1944년 조선에서 저비용으로 아편을 생산하고 대만, 관동주, 만주국에 수출해 돈을 벌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일본은 조선에서 재배한 아편을 팔아 돈을 벌었지만 조선인들의 아편 흡연이 노동생산성 저하, 범죄 증가로 이어져 식민 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고 아편을 엄격히 단속하면서 점차 아편 흡연이 사그라졌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조선시대#일제강점기#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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