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공론장은 부재하고 소통은 불가능하다.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민 윤리는 영양실조 상태다. 그 기원이 뭘까, 갈증을 느끼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57)는 지난 6년간 조선의 근대와 현대 한국사회를 분주히 오갔다. 그 연구의 첫 결과물이 2011년 출간된 ‘인민의 탄생’(민음사)이다. 조선후기 훈민정음의 확산으로 인민들 사이에 정보가 유통되면서 평민 담론장이 발전해간 과정을 밝힌 작업이었다. 그가 최근 후속편으로 ‘시민의 탄생’을 펴냈다. 조선의 인민이 더 이상 기존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존재론적 자각을 거쳐 근대적 시민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공론장 분석을 통해 추적한 책이다. 》
28일 연구실에서 만난 송 교수는 “1910년까지 시민의 탄생을 위한 씨앗은 도처에 뿌려져 있었다. 외국에 비해 아주 빠른 속도로 시민의 원형적 모습이 확산됐지만 일제강점이 그 씨앗을 동토 위에 버려뒀다”고 말했다. 식민 통치가 없었더라면 한국인들도 1920년대쯤 초기 형태의 시민사회를 형성했을 텐데 아쉽게도 일제하에서 자율성이 박탈된 ‘동굴 속의 시민’으로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은 그렇게 자율적으로 시민사회를 성장시키는 경험이 결핍된 채 탄생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1954∼61년에야 비로소 시민 개념이 나타났다. 이후 한국의 시민이 민주화를 이뤄낸 과정은 3년 뒤쯤 ‘현대 한국 사회의 탄생: 20세기 국가와 시민 사회’(가제)라는 제목으로 펴내 3부작 시리즈로 완성할 예정이다.
한국에는 왜 소통하고 타협을 이뤄내는 공론장과 성숙한 교양시민이 부족할까. “시민사회에선 이해갈등이 충돌하기 마련이고 자율성을 지닌 시민은 이를 정치적으로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충돌을 해결할 기제가 없는 식민지 상황에선 시민이 탄생하기 어렵습니다. 한말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지배층이 무너졌고 지배이념은 부재했으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평민들의 각축이 벌어졌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을 통해, 산업화 시대에는 재산 축적을 향해 무한경쟁을 벌였고 그런 혼란이 폭증한 게 지금의 상황입니다.”
송 교수는 “대한제국 시기와 현재 한국이 당면한 내외적 상황이 너무나 똑같다”고 강조했다.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의 4강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랐던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100년 뒤인 현재는 북한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져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 그는 “외부 세력은 우리에게 정말 중대한 도전인데 그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이 내부 갈등으로만 점철돼 있다. 한말과 다를 게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해서 유연한 통일전략을 구사해야 되는데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체제 대결도 (사실상) 끝난 마당에 반북 이데올로기로 성을 쌓아봤자 분열밖에 가져올 게 없죠.”
송 교수는 공론장을 회복하고 건강한 시민사회를 이뤄낼 방법으로 “자기주장이나 이념에 대한 자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양시민이라고 할 때 ‘교양’은 여러 이념들의 진실성을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이를 통해 상대방이 옳고 자신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자기검증’을 하는 거죠. 그런 상대주의적 관점이 들끓는 공론장에 합의점을 찾아줄 첫걸음입니다.”
송 교수와 절친한 가수 조용필 씨에게도 신간을 보냈는지 묻자 뜻밖에 인터뷰를 포괄하는 답변이 도출됐다. “보낼 겁니다. 조용필 씨도 역사에 관심이 많고 굉장히 혜안이 있는 분입니다. 그는 30년 뒤 한국의 대중가요가 어디로 갈지를 미리 판단하고 그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조용필 씨가 정치인이나 역사학자보다 훨씬 낫죠. 미래를 초청해야 갈등이 풀린다는 뜻입니다. 미래담론이 완전히 사라졌기에 한국사회가 이렇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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