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식의 재구성’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 표현의 뿌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잘못된 쓰임새나 문화적 착시현상으로 본래의 뜻을 벗어난 개념이 일상에서 상식으로 둔갑한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한국인들은 물 건너온 말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로 바꿔 쓰면 미묘한 뉘앙스가 살아나지 않는다면서. 그런 단어 중 하나가 오래된 꿈이나 공상의 대상이란 뜻의 ‘로망’이다.
사람들은 ‘로망’의 이 용법이 프랑스어나 영어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프랑스어 로망(roman)은 중세의 소설 장르를 뜻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소설. 애정담, 무용담을 중심으로 하면서 전기적(傳奇的)이고 공상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란 설명이 나온다.
뿌리가 같은 영어 로맨스(romance)는 뜻이 세 갈래로 나뉜다.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소설’이란 로망과 같은 뜻과 함께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과 ‘자유로운 형식에 아름다운 선율을 주로 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소곡’이란 뜻이 더해진다.
그에 걸맞은 뜻풀이를 담은 사전은 따로 있다. 일본어 사전에서 로망(ロマン)이란 표제어를 찾아보면 ‘일본어의 독자용법’이란 설명과 함께 ‘꿈이나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란 뜻풀이를 해놓았다. 프랑스어 로망은 독일로 건너가 낭만주의(romantik)의 어원이 됐다. 마찬가지로 영미권에선 달콤한 연애로 변신하고, 일본에선 오래된 꿈이나 공상의 대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 일본어가 한국에서 ‘입말’로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일본의 ‘로망 포르노’라는 성인 에로영화 장르가 한국에 보급된 시점이다. 1970년대 일본을 풍미한 이 장르명에는 공상으로만 가능했던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영상으로 실현시켜 준다는 뜻이 담겼다. 한국 여성들이 로망 운운하는 게 민망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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