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6인조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 팀을 이끄는 부부 멤버 레진 샤사뉴(왼쪽)와 윈 버틀러(왼쪽에서 두 번째)는 주류와 비주류 음악계의 공식을 모두 깨부수며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탈주한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넣는다. 화면에 곡 번호 ‘1’과 재생시간을 뜻하는 ‘0:00’이 나타나고 ‘0:00’ ‘0:01’ ‘0:02’ ‘0:03’….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CD 플레이어의 ‘앞으로 탐색’(◀◀) 버튼을 1초 이상 누른다. ‘0:03’ ‘0:02’ ‘0:01’…. 재생시간이 ‘0:00’을 지나더니 멈추지 않고 거꾸로 흐른다.(‘10:02’ ‘10:01’ ‘10:00’…) 곡 번호는 ‘0’을 가리킨다. 꼭꼭 숨은 ‘0번 트랙’이 나타난 것이다.
캐나다의 6인조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가 최근 낸 4집 ‘리플렉터’(사진)에 숨어있는 ‘0번 곡’을 찾아듣는 방법이다.
21세기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창의적 아이콘인 이들의 신작은 음악 안팎으로 신비가 가득하다. 로댕의 조각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표지는 흑백인데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특수 재질로 돼 있다. 앨범 제목(REFLEKTOR·반사체를 뜻하는 reflector의 변형)은 카리브 해의 섬나라 아이티의 전통문양인 베베(Veve) 안에 들어가 있다. 음악도 아이티의 전통음악, 라라(rara)의 영향을 받았다.
아케이드 파이어는 인디음악계의 반(反)영웅, ‘21세기 라디오헤드’로 통한다. 데뷔 앨범(2004년·‘퓨너럴’)부터 과감한 편곡과 남다른 감성의 진폭으로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3집 ‘더 서버브스’(2010년)가 빌보드와 UK 앨범 차트 1위에 오르고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확장했다. 앨범마다 다른 콘셉트로 음악 팬들의 뒤통수를 쳤다.
그간의 울퉁불퉁한 행보를 감안해도 ‘리플렉터’는 충격적인 음반이다. 춤추기에 충분한 반복적인 비트에는 때때로 더브(dub·레게음악에서 과장된 공간감을 주기 위해 쓰이는 음향효과)까지 가미되지만 6, 7분에 달하는 긴 악곡은 프로그레시브 록처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잔다르크나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화를 동원한 비극적인 가사에 미니멀하면서도 다층적인 악곡이 어우러지면서 무채색과 총천연색을 오가는 극적인 댄스 음악을 만들어낸다. 리더 윈 버틀러가 2011년 그의 부인이자 밴드 멤버인 레진 샤사뉴 부모의 고향인 아이티를 방문한 뒤 그곳의 음악과 삶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투영됐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복고적 요소를 진보적으로 활용해 드넓은 음악적 파노라마를 펼쳐내고 있다. 전작들과 궤를 달리해 아예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는 것 같다. 읽을수록 더 많은 게 읽힌다”고 했다.
꼭꼭 숨은 무제의 ‘0번 곡’에도 상징이 담겼다. 밴드는 10분 2초에 달하는 이 ‘숨은 곡’에 정규 수록곡 13개의 하이라이트 연주 부분을 짜깁기하고 일부는 거꾸로 재생해 섞었다. 0번곡은 ‘반사체’란 이름의 음반 앞에 놓인 상징적 반사체인 셈이다.
음반 구매자 중에도 앨범 전체 재생시간의 8분의 1에 달하는 이 곡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표지에는 나머지 13곡만 표기돼 있다. 숨은 곡은 CD에서 디지털 음원을 추출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디지털 음반이나 LP 버전에는 수록돼 있지도 않다. 일부 CD 플레이어에서는 탐색 버튼을 사용해도 0번곡이 재생되지 않는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 관계자는 “확인해보니 플레이어마다 0번곡 재생 가능 여부가 다르다. CD 전량을 현지 수입했고, 이런 내용을 아케이드 파이어 쪽에서 따로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는 “2집 ‘네온 바이블’에 입체적인 성경 이미지를 담고 3집에서는 LP 추출 음원을 디지털 출시한 것처럼 이번에도 앨범의 세계관을 독창적 방식으로 담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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