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됨이 독실하여 만 사람이 막더라도 나아간다는 뜻을 지녔다. 비록 대인(大人)이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숙종실록)
벼슬에 뜻이 없어 평생 재야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 수양을 닦는 학문)에 매진했다. 왕이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書筵官)으로 명했으나 이마저 고사했다. 마지못해 잠시 지방관리를 지냈을 땐 ‘현세의 부자(夫子·공자)’라 칭송받았다.
이만한 인물이라면 한 번쯤 듣기라도 했을 터지만 지포 박심(芝浦 朴심·1652∼1707)이란 이름을 대면 웬만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박심은 조선 양명학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양명학의 선구자인 정제두(1649∼1736)의 막역지우로 함께 사상적 체계를 세운 숨은 공로자였다. 6·25전쟁 때 그가 지은 문집들이 모두 소실돼 지금까지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최근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논문 ‘숙종조 박심 선생에 대한 재고찰’을 발표하며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당대만 해도 박심은 여러 대가들이 주목했던 학자였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76년 유배 갔을 때 박심은 귀양지까지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길 청했다. 우암은 주위 눈도 꺼리지 않던 그를 “참으로 두려운 친구”라며 놀라워했다.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1629∼1714)은 “그의 대성을 기대하는 마음이 짝사랑과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박심의 학문은 남달랐다. 정제두의 ‘하곡집(霞谷集)’에는 박심에게 경전의 해석을 놓고 여러 차례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쉽게도 박심의 글은 남은 게 없으나 ‘매옹한록(梅翁閑錄)’은 그가 저술하다가 아들 박양한(1677∼1746)이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심은 암행어사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박문수(1691∼1756)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이 집안의 전통이었을까. 박심은 홍천 현감(47세)과 영천 군수(54세)를 지내며 배곯는 주민이 없도록 전력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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