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와이어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와이어는 여러 가닥의 강철 철사를 합쳐 꼬아 만든 줄로, 당기는 힘이 뛰어난 재료다.
조병수건축연구소의 조병수 대표(56·사진)가 올 9월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완공한 고려제강의 키스와이어센터 기념관은 두꺼운 기둥과 보 대신 가느다란 와이어로 콘크리트 지붕을 들어올려 지은 뮤지엄이다. 현수교의 원리를 이용한 설계인데, 와이어의 장점을 활용한 건축 구조는 와이어가 주력 상품인 기업의 정체성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와이어는 기둥과 보의 부피를 줄여줘 공간 활용도를 높일 수 있어요. 고층빌딩의 경우 층수를 늘릴 수도 있죠. 와이어의 물성 자체가 유연해 구조계산을 정밀하게 해야 하는데 시공 사례가 적어 쉽지는 않았습니다.”
키스와이어센터 기념관의 콘크리트 지붕 무게는 836t. 이를 기둥 없이 와이어로 지탱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지름 35mm 굵기의 와이어로프 28개를 이용해 지붕을 들어 올린다. 이대로만 두면 벽체가 건물 가운데로 몰릴 수 있어 벽체 자체를 바깥쪽으로 당겨 힘의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그래서 양쪽 벽체 외벽의 위쪽에서 바닥까지 같은 굵기의 와이어로프를 설치해 바닥 쪽으로 당긴다. 땅속 15m 깊이에 설치된 와이어로프가 이를 견고하게 고정시켜준다. 결론적으로 와이어 1919.1m가 건물을 팽팽히 당겨 지탱하고 있는데 이는 1만2509명이 당기는 힘과 같다고 한다.
덕분에 뮤지엄 안으로 들어서면 6∼7.5m 높이에 27m 길이의 공간이 기둥 없이 펼쳐져 시원한 느낌을 준다. 뮤지엄 가운데는 키스와이어센터의 절정이 기다리고 있다. 와이어에 지탱해 공중에 붕 떠 있는 듯 설치된 달팽이 모양의 대형 철골 램프다. 이 오름길을 따라 걸으면 노출콘크리트와 가느다란 와이어 딱 두 가지 재료만으로 설계한 힘 있고도 날렵한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불어 와이어의 효용을 느끼게 된다.
램프는 벽을 뚫고 나가 이어지고 건물 바깥엔 물이 있는 야외 정원인 ‘수정원’이 있다. 램프의 아래쪽도 슈퍼 미러로 마감해 철을 가공하는 기업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재료가 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거울이다.
이외수문학관(2009년)과 땅을 파내고 그 속에 묻어 놓은 듯 지은 땅집(2009년) 설계로 유명한 조 대표는 미국 몬태나주립대 교수 시절부터 와이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0년대 초반 고려제강이 와이어 건축의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며 연구비를 지원했어요. 덕분에 1년간 강의를 접고 와이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지요.”
조 대표는 귀국 후 2007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자기 집을 지으면서 와이어를 시범적으로 사용했다. 지름 30cm 기둥 4개를 지름 15mm 굵기의 와이어 12줄로 대체해 지붕을 들어올렸다. 이후 경복궁 맞은편 유리빌딩인 트윈트리(2010년)와 경남 남해군 사우스케이프 호텔(2013년)에 와이어 건축 기술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덕분에 트윈트리는 1, 2개 층을 늘려 17층 규모로 올리고, 사우스케이프 호텔도 와이어에 지탱해 10m 길이의 캔틸레버(외팔보) 설계를 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와이어의 당기는 힘을 이용합니다. 와이어의 발명 덕분에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었죠. 기술이 발달해 훨씬 가느다란 와이어로 엘리베이터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엘리베이터 타워의 공간이 줄어들어 빌딩 건축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내년 5월 문을 여는 키스와이어센터 기념관이 와이어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직접 보고 느끼는 장소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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