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이런 오지가 있다면 믿을까? 기차를 타고 지날 수는 있어도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다시 말하면 철도는 놓였어도 도로는커녕 그 흔한 나무꾼 길조차 없는 산중.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거긴 또 어딜까.
길은 소통(疏通)이다. 그리고 그 시원(始原)은 동물이다. 애초에 시작은 멧돼지며 고라니의 발자국이다. 그 흔적을 사람이 쫓는다. 사냥이다. 그러다 보면 그 흔적은 통로가 되고 그게 다시 나무꾼을 불러들이며 훗날 자동차길도 그리로 난다. 그런데 여기선 그런 공식이 무시되고 일상이 생략됐다. 나무꾼 길조차 없는데 철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덕분에 역 주변엔 마을도 생겼다. 하지만 이웃한 두 곳은 여직 소통하지 못한 채 이제껏 단절 상태다. 낙동강 상류 급물살과 그게 관통하는 험준한 협곡과 산악에 차단당해서다. 그런지 이미 58년. 그곳은 영동선 철도가 지나는 경북 봉화군 소천면의 두 마을, 승부와 양원이다. 올 4월부터 오트레인(O-Train·중부내륙철도)과 브이트레인(V-Train·백두대간협곡열차)이 서는 낙동강 협곡의 강변 오지 역이다.
그러나 더이상은 아니다. 두 역을 잇는 트레킹로(6.5km)로 소통돼서다. 봉화군이 최근 낸 ‘낙동강 비경길’이다. 지난주 말 이 길을 직접 걸었다. 실제로도 이름 그대로였다. 그것도 아직 누구도 본 적 없는 비경의 연속이다. 왜냐면 물가로 새로 낸 길에서 만나는 협곡 풍경이 길을 내기 전까지 태초 이래 어느 누구도―1950년대 철도부설 공사 인부만 빼고―본 적이 없는 것이므로. 낙락장송 소나무로 뒤덮인 ‘뼝대’―하천용식으로 형성된 협곡 양편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을 부르는 강원도말―는 눈이 부셨고 켜켜이 두껍게 쌓인 낙엽의 산길은 카펫처럼 푹신했다.
오트레인과 브이트레인을 이용한 백두대간 철도여행길에 꼭 한번 걸어 볼 만한 낙동강 비경길을 최근 선뵌 ‘별밤열차’(일몰 후 운행하는 브이트레인)와 더불어 찾아본다.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
오전 7시 45분 서울역을 출발한 오트레인이 승부역(경북 봉화군 소천면 승부리)에 도착한 건 낮 12시 35분. 철길 바로 옆으로 흐르는 이 물은 백두대간 싸리재(태백시와 정선군 경계를 이루는 고개) 중턱 너덜샘에서 발원해 황지(연못)에서 솟구쳐 태백시내를 가로 지르는 황지천을 이루다 철암역에서 남행하며 비로소 낙동강이란 이름을 얻은 급류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다. 그 글귀는 절벽에 붙여지은 역사무실 옆 바위에 하얀 페인트로 쓰여 있다. 1963년부터 무려 18년을 여기서 근무한 김찬빈 씨(84)가 당시 직접 쓴 글과 글씨다. 뼝대의 절벽을 깎아 어렵사리 확보한 손바닥만 한 역에서 늘 혼자 근무했던 젊은 역무원에게 협곡의 하늘은 그가 가꾸던 세평 꽃밭마냥 작아 보였을 터. 당시의 절망감이 단박에 느껴지는 진솔한 시구다.
승강장 끝으로 가면 ‘영암선 개통기념비’가 있다. 바위에 새겨 넣은 이 글씨는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친필. 그는 산업동력이던 석탄 조달을 위해 태백탄전을 개발했고 그걸 나르기 위해 이듬해 영암선 철도(철암∼영주·87km) 건설에 착수한다. 하지만 전쟁 발발로 공사는 중단됐고 우여곡절 끝에 1955년 12월 31일에야 완전 개통시킨다.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국민소득은 320달러에 불과했던 터였으니 경제발전의 동력이 될 이 철도의 개통이 감격스러운 일이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 그런데 영암선 철도는 그 5분의 1이 교량과 터널―각각 55개와 33개―로 이어진 난공사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대통령 친필로 새긴 개통기념비까지 세웠는데 그걸 승부역에 둔 건 이곳이 최악의 난공사 구간이어서다.
비경길은 이 승부역과 다음 역(남쪽)인 양원을 잇는 6.5km. 나는 길을 떠나기에 앞서 역 아래 물 건너 언덕의 먹거리 장터로 향했다. 이건 매년 겨울 임시로 운행되는 ‘환상선 눈꽃열차’ 승객을 위한 시설로 임시막사에 열 개쯤의 식당과 상점이 있다.
낙동강 협곡 태초의 비경을 찾아서
승부역 아래 강변. 비경길은 여기서 강가로, 산중으로 이어진다. 겨울이라 강물은 수량이 적다. 그래서 흐름도 느긋하다. 겨울 오후 나른한 햇볕에 갈대도 졸음에 겨운 듯 흐느적댄다. 강 따라 걷는 발길은 가볍기만 하다. 시야는 툭 트이고 길은 평지라서다. 그러나 이내 길은 협곡의 물가로 이어지고 바위를 부숴 새로 낸 길은 돌무더기를 이뤄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물가를 걷노라면 거대한 뼝대의 우아한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수십 m 절벽 중간에 아스라이 뿌리박고 그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는 수많은 소나무의 늠름한 모습. 저런 위용이라면 인간 세상에서 영웅으로 거듭날 듯도 싶은데 그저 섣부른 칭찬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감탄만 할 뿐이다. 이렇게 강가를 걷는 동안 기차터널 하나를 지난다. 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 터널. 이건 협곡 물가로 길을 낼 수 없어 산을 타고 우회 통과한다. 그 초입은 승부역 3.2km 지점의 철교 아래다.
양원역까지는 이제껏 걸어온 만큼의 거리(3.3km). 강만 보고 오다보니 산길의 느낌이 색다르다. 혼자 걸어야 할 만큼 좁고 주변은 인적조차 드물다. 그런 와중에 다 쓰러진 화전민 폐가를 지난다. 새까맣게 녹슨 양철지붕엔 구멍이 숭숭 났고 한 채는 무너져 있다. 사람이 떠난 지 얼마나 됐을까. 그걸 가늠케 하는 유물이 보인다. ‘리어카 나무’다. 골조만 남은 녹슨 리어카가 뽕나무 가지에 걸린 채 지상에서 20cm가량 들어올려진 것이었다. 리어카 아래서 싹틔운 뽕나무가 자라면서 종내는 이걸 들어올리게 된 것인데 그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으로 미뤄 버려진 지 이삼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길은 산중턱을 가로질러 다시 협곡 안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협곡 절벽의 중턱에서 끊긴다. 비경길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된다. 절벽을 오르내리는 265개 계단을 놓아 협곡 강가로 새로 낸 길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 물가의 통로도 협곡절벽 가장자리에 설치한 잔도(棧道)다. 승부와 양원이 서로 소통하지 못한 건 이런 험준한 지형 탓. 잔교로 올라서자 이곳 명물인 거북바위가 코앞에 내려다 뵌다. 잔교는 터널 출구의 강변에 들어선 콘크리트 축대 아래로 빤히 보이는 세 번째 터널까지 1km가량 이어진다. 그걸 지나야 양원역이다.
같은 이름, 다른 군(郡)의 두 마을-원덕
낙동강 양편의 원덕은 애초 한 마을. 그걸 일제가 동편은 울진, 서편은 봉화군에 편입시켰다. 그럼에도 두 마을은 하나였다. 다리를 놓아 왕래하며 장(철암 춘양)도 함께 보고…. 그런데 철도가 놓이며 비극은 시작됐다. 열차가 서지 않은 탓이다. 비극이란 철도사고인데 무려 열세 명이나 숨졌다. 모두 승부역에서 내려 철길로 걸어오다가 터널에서 당한 사고다. 이리 시집온 언니를 찾아오던 여동생이 사고로 숨진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은 역을 세워 달라고 끊임없이 진정했다. 그러나 대답은 불가. 그러다 1988년 해결책이 나왔다. 역 대신 열차를 세워주겠다(무궁화호 하루 4회)는 것. ‘양원 임시승강장’은 그렇게 생겨났다. 주민들은 하도 반가워 스스로 역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곡괭이 삽을 들고 나와 승강장도 만들고 게딱지만 한 대합실도 지었다. 지금도 승강장이 있는데 한국철도 사상 최초의 민자역사다. 그 역사는 그 안에 빼곡히 적혀 있다.
양원은 올 4월부터 오트레인과 브이트레인이 정차하며 상전벽해를 이뤘다. 임시승강장은 역으로 승격했고 브이트레인과 오트레인 정차(10분)로 활기가 넘친다. 그래서 먹거리 장터도 섰는데 ‘10분 막걸리’가 인기다. 알루미늄 양푼의 잔술(1000원)로 소천면의 한 할아버지가 쌀과 옥수수로 빚은 맛좋은 막걸리를 낸다. 게다가 양원과 다음 역 분천을 잇는 트레킹로 ‘체르마트길’(2.2km)도 최근 열렸다. 종전엔 사람 그림자도 보기 힘들던 오지가 요즘은 활기 넘치는 산골로 변했으니 ‘단언컨대 낙동강 협곡에서 철도는 가장 완벽한 여행수단’이다.
▼ 土-日운행하는 별밤열차, 객실도 바깥도 꿈속인 듯 ▼
어둠이 내린 분천역. 자그만 시골 역사는 건물 가장자리를 장식한 전구의 불빛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역사 옆의 나무도 마찬가지인데 그 아래 누운 호랑이 인형이 귀엽다. 7일 오후 6시. 백호 무늬 디젤기관차에 빨간색 전망 객차 3량의 브이트레인(백두대간협곡열차)이 손님을 태우고 철암역을 향해 떠났다. 일몰 후 운행을 않던 브이트레인이 한밤 운행에 나선 이유. 이날부터 주말(토, 일)에만 운행하는 ‘별밤열차’(사진)다.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여행하는 로맨틱한 기차다.
그런데 별밤은 객차 안이 더 화려하다. 레이저 조명과 스티커, 각종 조명으로 연출한 별밤이다. 승무원의 이벤트도 이어지고 별밤에 어울리는 음악도 틀어 준다. 석탄난로에선 고구마가 익고 손을 맞잡은 연인의 마음에선 사랑이 익는다. 양원역에선 차에서 내려 불꽃스틱도 켜고 막걸리도 마신다.
운행 시간은 약 한 시간∼한 시간 반. 철암역에서 승차해 분천역에서 내릴 경우 숙소로는 봉화 황토테마파크를 권한다. 낙동강변 언덕의 초가집 황토방인데 군불 온돌에선 겨울밤이 더더욱 따뜻하다. 돌무더기 강가는 아침 산책에 멋지다. 아침식사는 소천면 소재지의 금강식당에서 한다.
관광열차 이용한 트레킹 즐기기: 열차로 하루 일정에 맞추려면 낙동강 비경길(6.5km)과 체르마트길(2.2km)을 이어 걷는다. ▽추천 일정(출발역별) △서울역 ①이동(오트레인): 서울(07:45)→청량리(08:07)→승부(12:35). 열차카페에서 점심 식사. ②트레킹(비경길): 12:40∼15:00 ③양원역: 휴식(15:00∼15:20) ④트레킹(체르마트길): 15:20∼16:30 ⑤이동(브이트레인): 비동(16:48)→분천(16:53) ⑥이동(오트레인): 분천(16:57)→청량리(21:45)→서울(22:05) △수원역: 12월 16∼17일, 2014년 1월 6∼7일, 13∼23일은 운휴 ①이동(오트레인): 수원(07:40)→천안(08:15)→승부(12:03). 열차카페에서 점심 식사. ②트레킹(비경길): 12:10∼14:30 ③양원역: 휴식(14:30∼15:20) ④트레킹(체르마트길): 15:20∼16:30 ⑤이동(브이트레인): 비동(16:48)→분천(16:53) ⑥이동(오트레인): 분천(17:44)→천안(21:42)→수원(22:14). 박준규 철도여행 프리랜서 겸 포토그래퍼 제공.
브이트레인: 낙동강 협곡구간(철암∼분천)만 운행하는 전망열차. 석탄난로에서 고구마도 굽는다. 각 역 하루 3회 출발(분천역은 10:05, 14:00, 17:10).
체르마트길: 비동승강장∼양원역 산길트레킹로(2.2km·한 시간 거리). 체르마트(Zermatt)는 알프스의 마터호른봉(4478m) 아래 빙하와 그 아래 산악마을(해발 1600m). 빙하에선 한여름에도 스키를 즐긴다. 장크트모리츠(생모리츠)를 오가는 빙하특급열차 종착역. 스위스관광청과 제휴해 체르마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봉화군 ▽먹거리 장터: 분천 양원 승부 등 철도역에서 운영 중. 식사와 옥수수막걸리, 팥 콩 오가피나무 등 특산물을 판다. ▽봉화한약우프라자: 안동봉화축산농협이 직영하는 정육점형 식당. 1인분 6000원. 봉성면 금봉리 916. www.bhhywoo.co.kr, 054-67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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