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공론장과 자유로운 시장, 두 개의 바퀴로 잘 돌아갈 것 같은 세계가 왠지 덜컹거린다는 느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동아일보 ‘책의 향기’가 주목한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이 올해 2월 출간된 ‘불평등의 대가’였다. 선정위원 37명 중 절반이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 올해는 소설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지난 몇 년간 2, 3권에 머물던 소설이 올해 4권이나 포함됐다. 인문학을 표방한 책이 많았지만 진정 눈 밝은 독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보석 같은 책들도 빛을 발했다.
불평등의 대가
2000년대 초 ‘80 대 20의 사회’가 불과 10여 년 만에 ‘99% 대 1%의 사회’가 됐음을 선언하며 시장을 통제할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폴 크루그먼과 더불어 미국 경제학계의 양대 이단아라 할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가 ‘시장에 맡겨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환상을 매섭게 비판했다. 도서평론가 표정훈 씨는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미국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한국사회에도 유효한 대목이 너무도 풍부하다”고 평했다.
정글만리
세계 최대의 공장이자 시장이 되면서 자본주의의 정글로 변한 중국을 배경으로 세계 각국의 상사 주재원들이 펼치는 숨 가쁜 경제전쟁을 담았다. 한국인의 삶에서 상수로 자리 잡은 중국의 실체를 실감나게 그렸다는 평가 속에 40, 50대 남성 독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출간 5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다. 올해 국내 출판계의 첫 밀리언셀러다. 내년 봄에는 중국어판도 출간될 예정이다. 종이책 출간에 앞서 인터넷 포털(네이버)에 연재해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됐다.
극장국가 북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창안한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빌려 북한 체제의 행태를 분석한 책.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북한에 적용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의 권헌익 석좌교수와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함께 쓴 이 책의 미덕은 북한의 다양한 형태에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해 풀어낸 점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이론과 현실을 탁월하게 연결한 일급의 사회과학 텍스트”라며 “그러나 공포와 억압, 감시와 통제의 측면이 소홀히 취급된 것은 아쉽다”고 평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대학교 2학년 때 고교시절 단짝 친구 넷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절교를 통보받은 다자키 쓰쿠루. 30대 중반이 되어 기차역 설계 엔지니어가 된 그가 절교 사유를 듣기 위해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삶의 성숙은 가슴 아픈 상실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이 엿보인다. 전작들에 비해 사람 사이의 유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하루키의 변화가 담겼다는 평을 받았다. 7월 초 출간과 동시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7주 연속 1위를 지키며 지금까지 40만 부가 팔렸다.
속삭이는 사회
밀실만 있고 광장이 없는 남한, 광장만 있고 밀실이 없는 북한이라는 통념을 깨고 북한 같은 스탈린주의 체제야말로 진정 끔찍한 밀실 사회임을 보여준 역사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저자가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옛 소련인들의 가족사를 추적해 1200쪽(전 2권) 가까운 분량에 생생히 그 실상을 담아냈다. 인간성 개조실험을 펼쳤던 스탈린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은 귓속말로 속삭이거나 누군가를 고자질하며 뼈아픈 인간성 상실을 경험했음을 고발한다.
28
전작 ‘7년의 밤’과 더불어 한국적 스릴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소설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경기 북부에 위치한 인구 29만 명의 소도시 ‘화양’을 무대로 정체불명의 인수(人獸) 공통전염병이 확산되고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는 상황에서 주인공들의 엇갈린 시선을 박진감 넘치는 필치에 담았다. 인간과 맹견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미국 작가 딘 쿤츠의 소설 ‘와처스(Watchers)’를 연상시킨다. 영화 판권도 팔려 2015년 영화화될 예정이다.
지구의 정복자
미국 진화생물학의 태두인 저자가 유전선택론에서 집단선택론으로 전향을 선언해 파문을 몰고 온 문제작. 인류가 어떻게 지구의 정복자가 됐는지를 설명하려면 종족을 퍼뜨리려는 유전자의 개체적 본능과 사회공동체의 집단적 협력이 함께 작용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개미 연구로 출발해 사회생물학을 창시하고 생물학을 토대로 모든 학문의 통합을 꿈꾼 팔순의 노학자가 오로지 진리추구를 위해 자신의 오류를 깨끗이 인정했다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살인자의 기억법
70세를 맞아 은퇴한 연쇄살인범 ‘나’가 치매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자신의 딸을 노리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내뱉는 독백 형식의 소설. 수십 명을 살해하고도 붙잡히지 않았던 자부심 강한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치매 때문에 내면부터 붕괴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포착했다. 미스터리 장르소설의 기법을 활용해 단숨에 결말까지 책장을 넘기게 하는 흡입력을 갖췄다. 영화제작사 쇼박스가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해 조만간 영화화할 예정이라고.
모든 것은 빛난다
“올해 발표된 인문학 서적 중 최고의 책.” 서평가 이현우 씨의 추천사다. 서구 문화사를 관통하며 문학과 철학을 꿰뚫고 있어 문사철의 묘미를 담뿍 느낄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이 겪는 허무와 우울이 우리들의 구체적 삶에서 발견하는 경탄과 기쁨을 상실한 데 있다며 ‘경이’의 재발견을 역설한다. 회의와 허무로 가득 찬 현대인은 말한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라고. 고대인의 지혜를 좇는 저자들은 말한다. “모든 것은 언젠가 한 번은 눈부신 빛을 발할 때가 있으니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식탁 위의 한국사
‘음식인문학’을 연구해온 저자가 대중적으로 쓴 20세기 한국의 음식문화사. 설렁탕 갈비 신선로 빈대떡 짜장면 막걸리 냉면 보신탕 등 근대 이후 100년간 우리 식탁을 장식한 34가지 음식의 기원과 발전 과정, 그 경제사회적 파장까지 담아냈다. “생물학적 음식에는 물질이 담겨 있지만, 문화적 음식에는 생각이 담겨 있다”는 저자의 말을 반영하듯 우리 근대 음식문화의 이면에 대한 맛깔 난 인문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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