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대문호 체호프를 향한 한국 연극계의 오마주… ‘디테일의 힘’ 빛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7일 03시 00분


연극 ‘공포’ ★★★★

배우들의 연기 호흡만큼 무대장치, 음향, 조명, 의상의 팀워크가 절묘하다. 괜한 장식으로 어설프게 놓인 건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린피그 제공
배우들의 연기 호흡만큼 무대장치, 음향, 조명, 의상의 팀워크가 절묘하다. 괜한 장식으로 어설프게 놓인 건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린피그 제공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작품을 좋아하고 잘 아는 관객이라면 이 연극에 대한 판단이 기자와 다를 수 있다. 체호프가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린 연극을 7월부터 서너 편 관람했다. 대개는 지루했다.

‘공포’는 2013년 한국의 연극인들이 체호프에게 바친 오마주(경의)다. 고재귀 작가(39)는 121년 전 체호프가 사할린 섬을 1년 동안 여행한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쓴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소설과 흡사하다. 젊은 나이에 도시를 떠나 농장을 경영하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의 집에 주인공이 찾아온다. 실린은 그를 지기지우(知己之友)로 환대한다. 어느 날 밤 주인공은 충동을 누르지 못하고 실린의 아내와 간통을 저지른다.

고 작가는 이름과 직업이 불분명한 이 1인칭 소설의 주인공 자리에 체호프를 놓았다. 올해 처음 우리말 번역된 산문집 ‘사할린 섬’을 쓰기 위해 친구의 농장을 찾아간 체호프가 겪었을 법한 상황이라 본 것이다.

꼼꼼히 읽어도 20분이면 충분한 분량의 짧은 글을 2시간 15분의 이야기로 늘렸다. 하지만 분량을 뻥튀기한 기색은 전혀 없다. 중요한 고비마다 귀에 꽂히는 대사는 소설에서 가져온 문장들이다. 희곡은 소설 속 인상적 문장들이 나오기까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의 과정을 풍성하게 강화했다. ‘각색해서 무대에 올리겠다’고 마음먹고 썼다기보다는, 소설을 치밀하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더 크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연출의 ‘풍’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본떴다. 대사는 시종 길고 복잡한 문어체다. 연기는 대놓고 ‘연극적’이다. 조금이라도 허술하다면 체호프의 팬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기 딱 좋다.

그러나 치밀하다. 귀에 걸린 대사 실수는 딱 두 번이었다. 배우들은 올 하반기 만난 다른 어떤 연극보다 명료한 발음을 들려줬다. 박상봉의 무대디자인은 9월 ‘천 개의 눈’에 이어 또 한 번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 치밀한 개연성으로 엮어낸 공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의상, 음악, 조명에도 어느 한구석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모호한 인물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제작과정에서 놓치지 않고 추구한 목적이었다”는 조연출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의’를 표하는 가장 좋은 방법, 기본기와 디테일 아닐까.

: : i : :

박상현 연출, 김태근 이동영 김수안 신덕호 신재환 정은경 이필주 박하늘 출연. 22일까지 서강대 메리홀. 3만5000원. 02-922-0826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공포#안톤 체호프#기본기#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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