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중견 출판사의 대표는 시집 20권을 구입했다. 지난해 지인들에게 보냈던 연하장을 대신해 올해는 시집 표지 뒷면에 연말 인사를 쓴 ‘시집 연하장’을 준비한 것이다. 그는 “연하장은 한 번 읽고 덮기 마련인데, 시집은 곁에 두고 내내 읽을 수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시가 담겨 있으니 인사말만 살짝 덧붙이면 된다”고 했다.
비교적 싼 가격도 시집을 선택한 이유다. 그가 구입한 시집 한 권 값은 8000원. 요즘 괜찮다 싶은 연하장은 한 장에 5000원이 넘고 비싼 것은 1만 원까지 나간다. 시집은 두껍지 않아 지인에게 우편으로 보내도 연하장과 가격 차가 적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 등 3종을 여러 권씩 구입했다. 올해 나온 시집 중 재밌게 읽은 시다. 그는 “시집 연하장을 보내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어떤 시를 의미 있게 읽었는지 나중에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올해 반응이 좋다면 내년엔 더 많은 시집을 구입할 생각이다”라고 했다.
시집 연하장이 언뜻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연하장 대신에 책을 보내는 풍속은 과거에도 있었다. 1983년 12월에는 다른 선물보다 싸고 인식이 좋은 책을 선물하는 유행이 퍼져 출판계가 대목을 맞았다. 당시 젊은층은 소유욕을 자극하는 예쁜 책을 선물하고, 선배는 후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책을 선사했다. 1992년 12월엔 책에 간단한 인사말을 담아 전하는 ‘책 카드’가 인기라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2013년 연말을 맞아 잊고 있던 풍속을 되살린다는 기분으로 시집 연하장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출판계는 불황에 빠져 있지만 연말에 책을 선물하는 풍속에 대한 과거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니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책 선물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고 욕먹는 경우도 없다는 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