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마음을 붙든 그림 앞에 몇 시간이든 주저앉아 말없는 대화를 나누길 즐기는 관객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레드’는 겨울날의 공연한 허전함을 뿌듯하게 채워줄 옹골차게 두툼한 연극이다.
100분 내내 무대는 오로지 하나의 공간에 머문다.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강신일)의 작업실. 허구의 인물인 조수 켄(강필석 한지상 더블캐스트)이 자연광을 차단한 그곳에 처음 찾아온 날부터 2년 뒤 해고된 날까지 나눈 대화가 대사의 전부다.
로스코는 1970년 67세로 작업실에서 자살했다. 생을 마감하기 12년 전 그는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집요한 디테일을 응집시켜 쌓아올린 미국 뉴욕의 38층 오피스빌딩 시그램타워 내 레스토랑 ‘포 시즌스’의 벽화 의뢰를 받는다. 레스토랑 공간을 디자인한 미스 반데어로에의 모더니즘 계승자 필립 존슨은 로스코에게 “그림으로 공간을 ‘장식’해 달라”고 청했다.
지금 거기에 로스코의 그림은 없다. 로스코는 어느 날 저녁 아내와 함께 포 시즌스에 다녀온 뒤 “거들먹거리는 분위기에 화가 치민다”며 계약금을 반환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만이었다. 연작 40여 점은 원래 구상대로 전시되지 못한 채 영국 일본 등으로 흩어졌다. ‘레드’ 무대 위 그림은 일본 지바 현 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붉은색이 간신히 움켜쥔 희미한 빛과 검은색 어둠이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인생에서 두려운 게 딱 하나 있어.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고 말거라는 거야.”
두 번째 장. 중국음식을 우물거리며 시작한 그림과 빛의 관계에 대한 대화가 붉은색에 대한 언쟁으로 이어진다. 앙리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1911년)를 처음 만난 날의 충격을 돌이키던 로스코가 우울하게 고백한다. “이젠 그 그림에서도 레드가 안 보여…. 피할 수가 없어. 블랙을.”
인간은 어둠 속에서 잉태돼 세상에 나오는 순간 처음으로 빛을 만난다. 나이가 든다는 건 빛에 집중했던 시선을 차츰 어둠 쪽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무대 위 로스코는 남은 열정의 빛을 세상의 어둠에 온전히 빼앗기는 시점을 조금이라도 늦춰 보려 애쓴다. 물론 패배가 시간문제일 뿐임은 잘 알고 있다.
마티스, 렘브란트, 모차르트, 니체 등 로스코가 심취했던 대상들이 줄줄이 언급된다. 하지만 예습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세 번째 장에서 두 배우는 모차르트의 ‘흥행사’가 흐르는 가운데 커다란 캔버스 가득히 붉은색을 칠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게 만드는 장면이다.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자연히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김태훈 연출(39)은 첫 작품을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만큼 유려한 디테일로 채웠다.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감정 변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촘촘히 찾아 붙였다. “혐오스러운 비평가들…. 화가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의 고통을 헤아릴 통찰의 순간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어. 침묵은, 너무도 정확해.” 다시 본 뒤 그저 침묵하고 싶어진다.
: : i : :
존 로건 작. 2014년 1월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3만5000∼5만 원. 02-577-1987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