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첫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조판하는 과정을 재현한 장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금속활자를 포도주압착기로 고정해 인쇄가 반기계화가 이뤄졌다. 반면 조선은 구리로 만든 조판틀에 밀랍을 끓여 부은 뒤 그 속에 활자를 심고 굳기를 기다렸다가 활자에 먹을 묻히고 다시 그 위에 종이를 덮어 두드려내는 수공업이어서 200쪽 책 1권을 인쇄하는 데 열흘 이상이 걸렸다. 청주고인쇄박물관 제공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 고려 말인 1377년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을 언급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다. 실제 금속활자 발명은 더 빨랐다. 직지심체요절에 앞서 1239년 이전에 인쇄된 ‘남명증도가’와 1234∼1241년에 인쇄된 ‘상정예문’이란 책이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1455년경 이뤄진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앞선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귀족과 성직자가 독점했던 지식의 확산과 종교혁명을 가져왔다. 반면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그와 같은 파급효과를 낳지 못했다.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의 책도 대부분 필사본으로만 읽히다 193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정식 책으로 인쇄됐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조선에는 세종이 발명한 한글이 있었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대중문자와 금속활자가 결합하는 출판혁명이 발생했더라면 조선은 세계 최고의 출판강국, 지식강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왜?
‘조선의 뒷골목 풍경’의 저자인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책을 집필했다. 이를 보면 팔만대장경 같은 불경 간행에 국력을 쏟아 부은 고려나 주자대전이나 주자어류 같은 유교경전 간행에 힘을 쏟은 조선 모두 국가 차원에서 서적의 간행과 보급, 유통을 관리했다. 당시 출판은 오늘날 사회간접자본(SOC) 취급을 받은 셈이다.
출판의 국가 독점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는 게 저자의 연구 결과다. 유럽에선 구텐베르크 자신이 민간 인쇄업자였고, 그의 인쇄술 발명 이후 50년 만에 유럽에서 250개의 인쇄소가 4만 종의 책을 출판했다.
반면 조선에선 첫 금속활자인 계미자가 나온 1403년부터 계축자가 등장한 1494년까지 90여 년간 11종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졌지만 인쇄소는 국가기관인 주자소(세종 6년 이후는 이를 흡수한 교서관) 딱 한 곳이었다. 같은 기간 이들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은 1000종을 못 넘었고, 종별 부수도 20∼200부밖에 안 됐다.
인구가 많았고 그만큼 책의 수요가 컸던 중국은 이미 송대에 민간 출판사와 서점이 등장했다. 일본도 도쿠가와 막부 이후 민간 출판사와 서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조선에선 18세기가 돼서야 민간의 상업적 출판업자(방각본 업자)가 출현했다. 이는 대부분 책이 한문으로 쓰였고 이를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이 제한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려 광종 때 과거제를 도입하면서 책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국가 차원에서 책을 중국에서 수입해 왕실도서관에 비치하고 남는 책을 조정 신료에게 나눠줬다.
주자학이 수입되는 1300년경 그 수요가 확산된다. 1314년에는 중국으로부터 2만7000권이라는 막대한 책을 한꺼번에 수입했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들은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대거 망실된다. 고려시대 책이 대부분 유실된 이유다.
조선이 건국되던 첫해 활자 주조와 서적 인쇄를 관장하는 서적원과 출판을 전담한 교서감(훗날 교서관)이 바로 설치됐다. 국가이념이 된 성리학 관련 서적의 체계적 보급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조선의 건국세력이 ‘독서하는 교양인’으로서 사대부의 나라를 꿈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는 책 한 권에 10만∼30만 개의 활자가 필요했다.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금속활자로 만들 때 다양한 서체의 대소문자를 포함해도 수백 개면 충분했던 것과 상황이 달랐다. 따라서 조선에서 금속활자는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 간행물에만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표음문자인 한글이 있었지만 이는 유교적 국가관을 담은 ‘삼강행실도’ 정도에만 적용됐다. 책값도 너무 비쌌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200쪽 안팎의 대학이나 중용 한 권의 가격이 상면포 3∼4필에 이르렀는데, 논 두세 마지기 1년 소출에 해당하는 쌀값이었다. 주자대전 같은 전집은 양민 25명이 1년 동안 나라에 바쳐야 했던 군포의 가격과 맞먹었다.
공급량도 절대 부족하다 보니 책을 사고팔 수 있는 서점을 만드는 일도 논의만 무성했을 뿐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실행되지 못했다.
국가가 서적의 인쇄 출판 보급을 책임지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서적문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읽히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다. 책은 인쇄되거나 그 외의 복제 과정을 거쳐 확산되지 않는 한 존재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책에 대한 이런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 조선의 출판문화는 직격탄을 맞는다. ‘서적의 푸른 바다’에 비유되던 왕실도서관 홍문관을 비롯해 200년간 쌓아온 조선의 서적문화를 일순 잿더미로 돌려놓은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임진왜란은 출판 후진국이던 일본을 출판강국으로 변모시킨 전기가 됐다. 조선에서 약탈해간 서적과 금속활자를 통해 인쇄문화에 비로소 눈을 떴기 때문이다. 서양 책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책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이후 서적문화를 다룬 다음 편이 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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