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입신(立身)’의 출발점이었다. 임금에게 합격증인 홍패를 받은 급제자는 임금이 축하의 의미로 하사한 종이꽃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악대와 광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이런 영광을 누린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
최근 완간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사진)의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 속에 답이 있다. 과거는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무려 503년 동안 이어져온 관리 선발제도였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문과(文科)로 급제자는 모두 1만4615명이었다. 매년 평균 29명만이 이런 ‘가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지역별로는 역시 도성인 한양 출신 합격자가 급제자 3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았다. 한양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이 많아 지방 출신에게는 원천적으로 불리한 구조였다.
그렇다면 한양 외에 조선 8도에서는 어느 지역이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을까. 유림(儒林)의 고향으로 불리는 경상도, 도성인 한양에 가까운 경기 지역이 아니었다. 정답은 바로 평안도.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기록이 남아 있는 영조 이후 합격자 5191명 가운데 829명(16%)을 배출했다. 당시 8도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경상도를 제친 것은 놀랍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평안도가 중국과의 무역로상에 위치해 부를 축적한 계층이 늘면서 과거를 준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많아졌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삼은 남인 세력이 조선 후기 몰락한 영향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이한 것은 평안도 출신 급제자 10명 중 무려 9.5명꼴로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었다는 점. 여기서 신분이 낮다는 것은 오늘날 전해지는 족보에 급제자의 이름이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거나 자기 씨족 중 유일한 급제자인 경우가 해당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신분이 ‘미천하다’ ‘비천하다’ ‘서출이다’는 기록이 있거나, 가까운 조상 중 벼슬아치가 없는 몰락 가문 출신도 포함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평안도 출신은 급제 이후에도 실제 관직을 받는 비율이 8도 급제자 중 가장 낮았고 요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한 교수는 “서북민 차별에 항거해 일어난 홍경래의 난도 상대적 박탈감, 즉 경제력도 있고 과거 급제자도 많은데 조정의 주요 직책에서 배제된 것에 대한 불만을 한 원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전체를 살펴보면 평균 3명 중 1명꼴로 신분이 낮았다. 전체 급제자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건국 초기였던 15세기(태조∼성종)에는 32.9%로 비교적 높았다가 양반들의 기득권이 강해지는 16세기(연산군∼선조)와 17세기 중후반(광해군∼현종)에는 각각 18.7%와 19.8%로 낮아졌다.
반면 조선 후기로 접어드는 숙종∼정조 대에는 37.6%, 순조∼고종 대에는 55.1%로 급증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분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높아져 조선 왕조 전체적으로는 V자 모양을 나타냈다.
한 교수는 “조선 왕조의 500년 넘는 ‘장수’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하지 않고 능력 본위의 시험제도인 과거 제도를 통해 하층사회에서 끊임없이 충원했다는 데 있다”며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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