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아나운서 아버지 “앞서갈 필요 없다. 인생은 즐기면 되는 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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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말 한마디]황정민(KBS 아나운서)

황정민(KBS 아나운서)
황정민(KBS 아나운서)
나의 신입 시절은 긴 편이었다. 마이크 앞에 자꾸 서 봐야 새내기 아나운서를 졸업하게 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누군가는 뉴스를, 또 다른 누군가는 대형 쇼를 맡으면서 얼굴을 알려가고 있을 때도 나는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었다. 아나운서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나의 재능은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은 채로 여기서 나이만 먹는 건 아닐까 맥 빠지는 날들이었다. 무기력에 빠져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1등 할 필요 없다. 1등 하면 다른 사람들이 뒤쫓고 남의 눈에 띄기 시작하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인생은 즐기면 그뿐이다.”

다행히도 그런 시절은 곧 지나갔다. 내게도 프로그램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바빠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체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프로그램이 내게 들어왔다. 그때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앞서 갈 필요 없다. 인생은 여유 있게 즐기면 되는 거다.”

새벽부터 회사에 가고 밤중에야 들어오는 생활을 하던 그때는 그런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송에 인생을 걸어 보고 싶었고,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지가 중요했고, 방송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는 귓등으로 흘려버렸던 이야기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그런 의미였구나. 인생은 즐기는 사람들의 것이지 1등의 것이 아니구나.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언제나 그 연배에 맞는 즐거움을 찾으셨다.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에는 격하게, 또 이제 산책밖에 하지 못할 체력이 되시니 동네에 멋진 산책로를 찾아 걸으신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찾고 계신다. 늘 아빠는 행복하다.

선배 엄마들을 만나면 나만 뒤처진 느낌에 마음이 급해진다. 영어 유치원도 안 보냈고 수학도 두 개씩 학원을 보내야 하고 국어도 논술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부모가 아니라 학부모가 돼야 하는 시점에 내가 너무 아이를 방만하게 키운 건 아닐까 걱정만 앞선다. 누군가는 다 아이들 하기 나름이라고, 잘하는 아이들은 어디에 두어도 두각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맘은 편치 않다.

아이에게 조금 쉬어가도 된다고 해줄 수도 있을 텐데 나의 조바심에 지금 넘어지면 다른 아이들 다 앞서 가고 더 힘들어질 거라고 위협과 협박으로 아이의 등을 떠미는 나의 모습이 싫다. 성공한 사람이 꼭 더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목표를 높게 잡으면 우리 아이가 자극받고 조금이라도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서 기왕이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인생을 즐기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내 아이들에게도 해줄 수 있을까? 꼭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 너답게 살라고 얘기해 줄 순 없을까?

황정민(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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