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과 21일, 경복궁에서 열린 스케이팅 파티에는 상당수의 서울 거주 외국인들이 참석했다. 연못의 얼음상태는 양호했으며, 참석자들은 정성스런 초대를 해주신 전하 내외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섬 위 여름정자(향원정)는 따뜻했고 가벼운 식사가 제공되었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발행한 영어잡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의 1895년 2월호에 실린 기사다. 스케이팅 파티가 열린 1895년 1월 17일, 21일은 음력으로 환산하면 1894년 12월 22일과 26일이다. 1894년이 구한말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연초 동학농민운동을 시발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갑오개혁, 청일전쟁 등 격동의 한 해였다. 결국 일본이 승자가 되면서 조선은 국권을 잃는 길로 들어선다. 이런 어수선한 시국에 고종은 왜 '스케이팅 파티'를 잇달아 열었을까.
1894~1897년 한국을 네 차례 방문한 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1831~1904)의 기록은 당시 왕실의 분위기를 읽는데도 도움을 준다. 비숍 여사는 이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조선인의 삶을 취재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 생생히 담았다. ● 사실상 가택연금 '왕과 비'
갑오년 겨울 경복궁은 무기력하고 암울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게다가 "유약한 성격의 왕은 음모가들에게 쉽게 휘둘렸다." 특히 강력한 영향력을 상실한 "명성황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대원군은 끊임없이 명성황후의 목숨을 노렸다. 고종이 외국인을 접견하는 알현실엔 염탐꾼의 '그림자'가 무시로 비쳤다. 그 무렵 경복궁을 4차례나 방문해 고종내외를 알현한 비숍 여사는 "나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나중에 그 '그림자'가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라고 들었다. 이 사람은 왕과 왕비가 외국인 공사에게 뭐라고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떨어진 국왕의 위상 '거둥의 정치학'
3월 초 서울에 첫발을 디딘 비숍 여사는 "지금까지 본 가장 진기한 광경"인 왕의 행차 '거둥(擧動)'을 목격한다. 비숍 여사는 "15만 명을 헤아리는 엄청난 군중들"이 어가가 지나가는 "종로대로 양쪽에 12줄을 이루어 서서" 진심으로 왕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데 깊은 인상을 받는다. 또 "지구상 어디에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장관"에 흥분한다. 이때 고종은 붉은 옷을 입은 40명의 수행원이 메고 있는 높고 휘황찬란한 가마(연)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비숍 여사가 9개월 만에 다시 본 행차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스케이팅 파티 열흘전인 12월 12일, 고종은 일본의 강압으로 종묘에 나아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홍범14조를 선포했다. 그러나 이날의 '거둥과 비슷한' 행차 모습은 자주독립선언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쇠락한 국왕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비숍 여사는 "단 네 명이 멘 양쪽에 창을 낸 평범한 목재 가마를 타고 있었고, (고종은) 창백하고 낙담한 모습이었다"고 안타까워한다. "왕세자도 이와 비슷한 가마를 타고 뒤따랐다." 반면 일본 경찰의 특별경호대를 거느린 "친일내각 대신의 위풍당당함은 국왕의 위엄을 능가하고 있었다."
●한줄기 희망 '스케이팅 파티'를 열어라
고립무원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서양인들을 만나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련한 것이 '스케이팅 파티'였다. 일종의 스포츠 외교인 셈이다. 특히 절치부심하던 명성황후에게 '스케이팅 파티'는 염탐꾼의 눈귀를 피해 외부세계와 소통하고 조력자를 구하는 좋은 기회였다. 왕과 왕비는 이 모임에서 유용한 정보도 얻고, 일본이 밀어붙이고 있는 일련의 개혁에 대한 서양인들의 반응도 함께 살폈다. 비숍 여사에 따르면 "왕의 외국인에 대한 호의는 두드러졌다. 여러 가지 위험에 처했을 때 솔직하게 그들의 도움에 기댔다. 두 번째 알현했을 때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친절을 보였다. 심지어 연못 위에서 스케이팅 파티를 열어 모든 외국인들을 초대했다"고 향원정 '스케이팅 파티'를 재확인해 주고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때로 이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친분을 쌓는 한편, 각국의 제도 풍습 등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 여선교사 스크랜턴 부인, 언더우드 부인이 왕비를 알현했다"고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는 보도하고 있다. 비숍 여사에겐 영국의 관리등용 제도와 귀족들이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 왕과 내각의 관계는 어떤지 자세히 묻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특히 "왕비의 개인적인 경비를 내각에서 제재할 수 있는지, 왕비가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이렇게 고종과 명성황후는 권토중래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도움으로 잠깐 권력을 다시 잡는가 하더니, 을미년에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됨으로써 그 꿈은 끝내 좌절한다. 한편 이날 '향원정 파티'를 보도한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의 기자이자 편집을 맡았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후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향원정은 한국 스포츠외교의 발원지?
향원정 '스케이팅 파티'. 그때로부터 120년이 흘렀다. 경복궁 작은 연못에서 출발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스포츠 외교'는 한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은 88올림픽, 2002월드컵, 2011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치르고 2018겨울올림픽까지 유치함으로써 스포츠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스포츠외교'의 강국이 되었다.
8일부터 러시아 소치에서 겨울올림픽이 열전에 돌입했다. 향원정에서 마냥 신기하게만 바라보던 그 스케이팅 종목에서 한국은 대거 금메달을 노린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빙상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를 따내 종합순위 5위를 달성 한 바 있다. 한국은 이미 120년 전의 한국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치지형은 비슷하다는 말도 무시할 수 없다. 얼음판 위의 성적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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