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원정 연구원 ‘괴성도 분석’ 논문
한발 꺾어들고 한손엔 붓 든 형상… 明나라때 ‘수험의 신’으로 받들어
한반도에도 전파돼 ‘뇌공도’로 남아
중국엔 시험 합격을 관장하는 별자리 신이 있다?
‘공부의 신’이라 하면 드라마나 만화를 떠올릴 사람이 많겠다. 하지만 중국이나 대만은 다르다. 요즘도 수험생 책상 앞에 얼핏 요괴처럼 보이는 그림을 붙여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신(神)이 바로 도교에서 유래한 ‘수험의 신’ 괴성(魁星)이다.
배원정 월전미술문화재단 초빙연구원(33)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지 ‘미술자료’ 제84호에 게재한 논문 ‘괴성 도상의 기원과 전개’를 통해 중국 문화에서 혁혁한 위상을 차지하는 괴성을 분석했다. 현재 국내에선 괴성이 다소 생소하지만, 조선회화에 그림 소재로 등장하곤 해 한국과도 인연이 얕지 않다.
으뜸 혹은 우두머리 별로 해석되는 괴성은 본래 북두칠성의 첫째 별로 딱히 학문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다 네 번째 별인 규성(奎星)과 혼동을 일으키게 됐다. 奎도 한나라 땐 으뜸이란 의미로 통용된 데다, 魁와 奎 두 글자의 중국어 발음이 ‘쿠이’로 같다. 도교에서 규성은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신격화됐다. 이 신은 본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나, 이름에 글월 문(文)이 들어 있다 보니 학업 운도 다스린다는 믿음이 더해졌다. 흐르는 세월 속에 혼용되다 괴성이 문창제군, 즉 학문의 신이자 수험의 신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면서 괴성이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부터 네 번째 별을 아우른다는 풀이도 생겼다.
괴성이 ‘전국구 스타’가 된 건 명나라 때였다. 명태조 주원장(1328∼1398)이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다”며 6세기 수나라 때 생긴 과거를 전면 확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시험만 잘 보면 벼슬에 중용했다.
괴성의 인기도 함께 치솟았다. 명대의 문집 ‘엄산외집(儼山外集)’에는 “시험장 앞에서 점토로 만든 괴성 인형을 팔았다”고 나온다. 감독관이 미신에 기대지 말라고 타박해도 소용이 없었단다. 지방 고을마다 문창각(文昌閣)이나 괴성루(魁星樓)가 들어서 제사 지내는 이들로 성황을 이뤘다. 배 연구원은 “괴성신앙은 청대로 이어져 문창제군 탄생일(음력 2월 3일) 제사엔 황제가 보낸 대신이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괴성의 도상(圖像)도 흥미롭다. 한 손에 붓을 든 이유는 짐작되나, 꼭 한 발을 꺾어 들었고 ‘됫박’이 등장한다. 이는 한자 괴(魁)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괴 자에서 왼쪽 변인 ‘귀신 귀(鬼)’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모양새처럼 보인다. 됫박은 오른쪽의 ‘말 두(斗)’를 형상화한 것으로 됫박 모양의 북두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괴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화가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이 함께 그린 ‘해상군선도’(한양대 박물관 소장)에서 왼편에 입맞춤하는 여인네처럼 한 다리를 구부린 괴성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덕성(1729∼1797)의 ‘뇌공도(雷公圖·천둥의 신)’도 도상을 따져 보면 괴성도로 봐야 옳다. 배 연구원은 “중국처럼 폭발력은 없었으나 한반도에도 괴성신앙이 전파됐음을 증명하는 사료가 많다”고 말했다.
조선도 과거를 치렀는데 왜 확산되진 않았을까. 괴성이 유행한 명엔 ‘삼교합일(三敎合一)’ 풍조가 만연했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아우르며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은 유교이상사회 건설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국가다. 도교나 불교가 자연스레 공존했지만, 엄격한 유학자가 대놓고 도교 신을 모시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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