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첫맛은 담백, 뒷맛은 깔끔한 조선 한시의 세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한시의 품격/김풍기 지음/316쪽·1만5000원·창비

조선시대 최고, 최대의 문학 장르였던 한시에 얽힌 흥미로운 문화사를 담아냈다.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단순히 선인들의 한시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작(詩作)과 권력의 관계, 표절과 대작(代作)의 경계, 비평과 문학이론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를 자연스럽게 버무려 한시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양반 계층의 전유물로 알고 있는 한시에 개성과 멋을 더한 중인과 서얼의 기여를 밝혀낸 부분도 흥미롭다. 이들은 한시를 성리학적 수양의 결과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본 양반층의 미학에 맞서 본연의 순수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독자적 미학을 창출했다. 또 양반사회의 변두리에서 느끼는 불우함과 울분을 승화해 마음속 성정을 솔직히 드러낸 궁노 출신의 최기남(1586∼미상), 역관 출신의 홍세태(1653∼1725) 같은 시인과 만나게 되는 기쁨도 쏠쏠하다.

유명 문인들의 이름이 거론된 표절에 대해 다룬 장도 흥미롭다. 남의 시의 치장만 조금 바꿔 아름답게 구미는 ‘장점(粧點)’, 표절 의혹을 피하려고 지능적으로 남의 시에서 글자만 몇 개 바꾼 ‘도습(蹈襲)’, 부와 권력을 이용해 아예 대신 시를 지어주는 그림자 작가를 뒀던 ‘대작(代作)’이 당시에도 만연했다. 창작과 표절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지식인의 창작 윤리에 관한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중국 사신에게서 ‘동방 최고의 문장’이라는 칭찬을 받은 유영경(1550∼1608)의 시문이 실은 당시 명문장가로 꼽혔던 최립(1539∼1612)이 상사를 위해 대신 지은 작품이라는 비화에서는 당대 지식인의 비애까지 묻어난다.

이 책은 한시 창작론만큼이나 비평론에도 지면의 상당량을 할애했다. 좋은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좋은 시를 알아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뜻일 테다. 특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시를 맛에 비유하는 문학론의 얼개를 만들었다는 평가는 새롭다. 허균처럼 이 책의 재미를 맛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첫맛은 담백하고 뒷맛은 깔끔하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한시의 품격#한시#문화사#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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