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선율, 핑크빛 조명, 그 가운데를 남녀 쌍쌍의 바람이 흐른다. 밤의 서울 8시 캐바레(카바레)와 비밀 댄스홀엔, 그때부터 하루 일을 시작하는 사내들이 있다. 웨이터도 아니고 악사도 아니다. 이름을 붙인다면 ‘유부녀 제비족’.”(동아일보 1967년 9월 19일자 기사)
‘유흥가를 전전하며 부유한 여성에게 붙어사는 젊은 남자를 이르는 속된 말’인 ‘제비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실린 신문 기사다. 제비족 또는 제비라는 단어에 실린 이런 뜻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여러 설이 있다. 우선 사교댄스를 출 때 남성이 입는 제비 꼬리 모양의 ‘연미복(swallow-tailed coat)’ 기원설이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강남(중국 양쯔 강 이남)으로 갔다가 봄이 되면 돌아오는 제비에 빗대 1970년대 이후 서울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강남 여성을 유혹하려 몰려든 ‘노는 남자’들을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제비의 날렵한 몸놀림이 무대 위 남성의 춤동작과 닮아서라든가, 제비의 왕성한 생식력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영어에선 제비족 같은 남성을 ‘라운지 도마뱀(lounge lizard)’이라 부른다. 호텔 로비나 사교장을 어슬렁대는 모습을 도마뱀에 빗댄 것. 실마리는 오히려 일본어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어 사전에서 ‘제비’를 검색하면 ‘연상의 여성에게 귀여움 받는 젊은 남자’라는 뜻이 나온다. 제비에 이런 뜻이 담긴 것은 20세기 초 일본의 여권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1886∼1971·사진)의 연애 스토리가 기원이 됐다고 한다.
히라쓰카는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해 ‘세이토샤(靑탑社)’라는 단체를 만들고 ‘세이토(靑탑)’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다. 그는 5세 연하의 서양화가 오쿠무라 히로시(奧村博史)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이 혼인신고도 안 하고 동거하는 것을 두고 동료들이 손가락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오쿠무라는 ‘조용한 물새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는 곳에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와 평화를 망쳤다. 젊은 제비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날아가 버린다’는 시를 남기고 히리쓰카의 곁을 떠난다. 이 시구에서 ‘젊은 제비’는 오쿠무라 자신을 가리킨다.(하지만 둘은 결국 1918년 결혼했다)
이후 일본에선 여성의 나이 어린 애인 또는 정부(情夫)를 ‘제비’로 표현했고, 이 말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그 뜻이 일부 변용을 겪어 현재와 같은 쓰임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 일본어 사전 ‘大辭泉’(小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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