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박제가 된 천재’로 부른 시인 이상의 난해한 초기 시의 비밀이 풀렸다. 난수표 같은 숫자가 잔뜩 등장하는 그의 시가 1930년대 이뤄진 천체물리학과 수학의 혁명적 연구 성과를 시적으로 변용한 것임이 밝혀졌다. 수(자연과학)와 시(인문학)의 통섭을 꿈꾼 산물이었다는 해석이다.
김학은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68)는 지난달 펴낸 ‘이상의 시 괴델의 수’(보고사)에서 이상이 1930∼34년에 발표한 46편의 시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냈다.
이상의 시에는 ‘슬리퍼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국문학계에선 그간 ‘실내용 덧신’이라 여겼다. 김 교수는 이 ‘슬리퍼어’가 미국 천문학자 베스토 슬라이퍼(1875∼1969)임을 밝혀냈다. 시 ‘一九三三, 六, 一’을 보면 ‘天秤우에서 三十年동안 살아온사람(엇던 科學者)/삼십만 개나 넘는 별을 다 헤어놋코만 사람(亦是)’이란 구절이 나온다. 전자가 미국 로웰천문대에서 별을 관측하며 적색편이와 청색편이 현상을 발견한 슬라이퍼라는 것이다. 후자는 27만 개의 별을 조사한 미국 하버드천문대의 에드워드 찰스 피커링(1846∼1919)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에드윈 파월 허블(1889∼1953)이 은하의 거리가 멀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는 허블법칙을 발표한다. 바로 1931년이다.
1931년은 이상 시에 숨은 암호를 풀어내는 데 ‘로제타석’이 된다. ‘작품 제1번’이라는 부제가 붙은 ‘一九三一年’이란 시에 수의 세계를 시로 형상화하려는 이상의 야심이 응축돼 있다. 1931년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920년부터 시작된 소우주론(우리 은하가 우주다) 대 대우주론(우리 은하 외에 다른 은하가 있다)의 대논쟁이 허블법칙의 발견으로 대우주론의 승리로 끝나고 아인슈타인이 우주팽창론을 수용한 해였다. 또 초신성이 발견된 해이자 인류 최초로 외계 전파를 포착한 천체물리학 혁명의 해였다. 이뿐만 아니다.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이 모든 수학체계에 모순이 필연적이라는 불완전성정리를 발표해 수학의 확실성의 토대가 무너진 수학혁명의 해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이를 토대로 이상의 대표작 ‘오감도’ 제1호 시의 비밀을 풀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十三人의 兒孩’는 ‘1930년대의 아이들’을 말한다. 이 아이들은 막다른 골목길(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을 달린다. 막다른 골목은 우주 크기의 변화가 없다는 정상우주론과 연결되는 소우주론을 상징한다. 우주팽창론과 연결되는 대우주론은 시 후반부에 등장하는 뚫린 골목(길은뚫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으로 형상화된다. 이 아이들은 골목길을 달리며 모두 무서움에 떨지만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로 나뉜다. 전자는 소심한 할로 섀플리(1885∼1972)로 대표되는 소우주론자이고 후자는 자신만만한 히버 커티스(1872∼1942)로 대표되는 대우주론자다. 결국 이 시는 1930년대 이뤄진 천체물리학의 논쟁과 발견을 형상화했다는 해석이다.
이런 독해는 다른 시에도 적용된다. ‘선에 관한 각서5’에는 ‘확대하는 우주를 우려하는 자여, 과거에 살으라’라는 시구가 등장한다. 또 ‘건축무한육면각체’ 연작시는 사각형 하늘이 무한 팽창한다는 팽창우주론을 숫자와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상의 오감도 제6호 시 역시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불완전성정리는 모든 수학적 논리체계 내부에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불완전 영역이 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6호 시는 앵무가 포유류냐 아니냐, 소저(小姐·아가씨)가 부인이냐 아니냐는 논리적 모순을 다룬다. 게다가 ‘sCANDAL이란것은무엇이냐’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괴델은 수리공식을 쓸 때 s를 ‘바로 다음’이란 뜻의 기호로 썼다. 김 교수는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질 수 없는 것이 소문(scandal)의 특징인데 이상은 소문이란 표현을 쓰면서 이를 괴델의 수학기호 s를 활용해 시적 변용을 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은 19세 때 잡지 ‘조선의 건축’ 표지 공모에서 1등과 3등을 차지했다. 김 교수는 3등작 표지 도안이 1917년까지 세계 최대 천체망원경이었던 영국 ‘파슨스타운의 괴물’을 추상화한 것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 도안은 시 ‘一九三一年’에 등장하는 ‘R靑年公爵’과도 연결된다. R청년공작은 파슨스 천체망원경을 세운 윌리엄 파슨스(1800∼1867)로, 그의 공식 칭호가 ‘로스(Rosse) 백작 3세’였다.
문제는 현대인도 잘 모르는 이런 과학적 사실에 이상이 과연 정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김 교수는 “이상은 서울대 공대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자연과학도였다”며 “이상은 틈만 나면 서점에서 몇 시간씩 서서 책을 본 것으로 유명했는데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갈 때 ‘조선에선 더 읽을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독가였다”고 설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