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마이크로소프트(MS) 디자인팀 5명이 비밀리에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있는 아트센터디자인대학(Art Center College of Design·ACCD)을 찾았다. 이들의 임무는 MS가 내놓은 태블릿 신제품 ‘서피스’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첨단 액세서리를 고안하는 것.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이 학교를 찾은 것은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난 학생들의 신선한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ACCD 학생 11명과 3일간 숙식을 같이하며 작전회의를 가졌다. 작전명은 칼날을 뜻하는 ‘블레이즈(blades)’.
작전명처럼 날카로운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지만 고도의 정보기술(IT) 지식이 없으면 생각해내기 힘든 3차원(3D) 비디오 합성, 음악 믹싱 기능을 갖춘 액세서리들을 제안했다. 이들이 참여한 서피스 신제품은 올해 초 출시돼 ‘기발하다’ ‘혁신적이다’는 반응을 얻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제품 개발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이 중 상당수 학생은 MS로부터 취업 제의를 받았다.
ACCD는 미 서부의 대표적인 종합예술대학이다. 학교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패서디나에서 산길을 20분 정도 차로 올라간 곳에 있다. 11개 전공분야에 학사와 석박사까지 2000여 명이 재학 중인 ACCD는 예술창작 시설과 기구를 유지하는 데 큰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외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테리 본드 ACCD 마케팅국장은 “캠퍼스가 산속에 있다 보니 학생들은 도시의 산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아이디어 개발에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ACCD에는 강의실이 없다. 모든 수업이 실습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일부 실습실은 대규모 절단기, 분쇄기, 시멘트가 있어 마치 공장처럼 보인다. 실습실은 24시간 열려 있어 학생들은 한밤중에라도 작품을 만들 수 있다.
ACCD가 뉴욕의 예술학교들과 다른 점은 기업과의 연계성이 높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실리콘밸리와 가깝다는 이점을 살려 IT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적용되는 예술 분야가 발달했다. MS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기업들이 ACCD를 찾아와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경청하고 이들과 공동작업을 한다. 삼성도 1995년 일찌감치 ACCD에 300만 달러(약 32억 원)의 기금을 설립해 디자인 전략을 공동 개발하고, 디자인 마케팅 공학 인력을 ACCD로 연수 보내기도 한다.
최근 기자가 자동차 디자인 실습실을 찾았을 때 졸업반 학생들이 대형 자동차 모델을 만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개 2학기에 걸쳐 졸업 작품을 제작한다. 자동차 모델에는 폴크스바겐, 마쓰다, 도요타 등 유명 자동차 로고가 붙어 있었다. 학생들은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가 되면 자동차 업체와 접촉해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 개발과정에 도움을 받는다. 졸업 작품 전시회 때는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한다. ‘창작 과정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를 수 있다’고 지적하자 학생과 교수들은 “기업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반박했다.
ACCD 학과 과정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이윤 창출이 가능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학생들은 비즈니스코스를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 프레드 펠로 ACCD 학장은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학생들에게 ‘너의 작품을 어떻게 시장에 내놓을 것이냐’를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ACCD는 지난해 6월 명문 공대인 캘리포니아공과대(Caltech)와 손잡고 ‘디자인 액셀러레이터’라는 창업 인큐베이터를 설립했다. 두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들 가운데 혁신적 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IT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 선발된 20여 명의 창업자는 지원금과 교수진의 조언을 받고 학교 시설을 3개월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이 학교가 경제적인 관점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로비 중앙에는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대표 작품을 전시한 행사장이 있는데 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장애인과 노약자를 보조하는 다층 접이식 목발, 특수 고안된 휠체어 같은 의료용 기구들이다. ACCD는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NGO) 자격을 가장 먼저 획득한 디자인 예술기관이기도 하다. 유엔과 협의하에 매년 학생들을 아프리카, 남미 등에 파견해 주민 생활을 도울 수 있는 기구들을 개발한다. 발 동력으로 가동하는 세탁기, 다층 입구식 식수기 등은 ACCD 학생들이 고안해 만든 뒤 제3세계 국가들에서 사용되는 기구다. 펠로 학장은 “학생들은 예술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접목한 작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다”며 “이런 작품들의 상업적 활로를 찾아주는 것이 학교의 목표”라고 말했다. ▼ 첨단 예술 집중 육성하고 기업에 이어줘 ▼ LA카운티 미술관의 ‘아트 앤드 테크 이니셔티브’ 프로그램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LA카운티 미술관(LACMA)은 서부 최대 규모로 다양한 인종을 위한 다문화 예술 작품을 많이 전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미술관은 첨단예술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인 ‘아트 앤드 테크 이니셔티브(ATI)’를 운영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에서 미술관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곳은 LACMA가 유일하다.
ATI는 첨단기술이 가미된 예술 작품 제작에 자금을 대주고 예술가를 정보기술(IT) 기업들과 이어주는 프로그램이다. 구글, 스페이스X, 액센추어, DAQRI, NVIDIA 등 5개 IT 기업이 작품 제작에 자문역할을 해준다. 올해 첫 회인데 최근 마감된 공모전에는 475개 작품이 출품됐고 4월 2∼5개 작품이 최종 선발된다.
LACMA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다. 앤디 워홀, 제임스 터렐, 클래스 올덴버그 등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트 설치 예술가들이 당시 LACMA의 지원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첨단기술은 자동차와 우주항공 기술이 대부분이었는데, LACMA와 일본 오사카 엑스포에 순회 전시됐던 워홀 등의 작품은 지금도 예술계에서 회자된다.
40여 년이 흐른 후 LACMA가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을 재개한 이유는 사회 여러 분야에서 예술과 첨단기술의 접목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선정된 작품에는 작품당 최대 5만 달러가 지급된다. 지원금은 LA카운티 생산투자펀드와 자문역인 5개 IT 기업이 마련했다. 최종 선발자들은 LACMA 디지털 연구소에 마련된 IT 기기들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내년 4, 5월경 LACMA 앞뜰 야외 공간에서 전시회를 갖게 된다.
ATI를 담당하는 조엘 페레 LACMA 매니저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기술 실험을 위한 재정적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많은 예술가가 지원했다”고 말했다. ATI 프로젝트는 단순한 작품 전시에 그치지 않고 예술 창조의 전반적인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 공공 미술관의 역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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