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지만, 그립다고 해선 안되는 고향이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0일 03시 00분


신승모 교수 논문 통해 ‘식민자 2세’ 日작가들 조명

“그 착취와 압정에 가담한 측의 인간이 과연 그리워하거나, 옛날 그대로 기뻐하거나… (해도 용인되는 것인가).”(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소설 ‘잘 있거라, 경성’ 중에서)

그들에게 이 산천은 고향이었다. 나고 자랐고 뛰어놀았던 땅. 하지만 한순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듯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깨달았다. 우리는 한국인에게 몹쓸 존재였구나. 어린애였노라 변명한들 그 죄의식은 씻기질 않았다.

일본 문단에는 ‘식민자(植民者) 2세’라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태어나 주로 10대에 패망을 맞고 귀환해, 1950년대 이후 등단한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 추억과 이후 알게 된 실상 속에서 겪은 모순과 갈등을 작품에 녹여냈다. 신승모 동국대 교수는 최근 학술지 ‘일본학’에 게재한 논문 ‘식민자 2세의 문학과 조선’에서 이들의 작품을 조명했다.

경남 진주 태생의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71)의 ‘눈 없는 머리’(1967년)는 식민자 2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작품이다. 주인공 소년 사와키는 ‘언제나 상냥한’ 조선인 이경인을 따랐다. 하지만 이경인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를 걱정해 면회를 간 사와키는 이전 모습은 사라지고 ‘괴물’처럼 변한 이경인을 발견한다. 사와키는 “아이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것에 부닥친” 느낌을 토로한다.

함경남도 출생인 고토 메이세이(後藤明生·1932∼1999)의 소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972년)’는 좀더 직접적이다. 주인공은 독백처럼 “전쟁이 끝났을 때 소년시절은 끝났다”고 되뇐다. 철없던 유년의 추억조차 원죄로 떠올려야 하는 운명을 되새김질한다.

“저는 ‘태어난 고향’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고향에서 추방돼서, ‘조국 일본’으로 귀환해온 셈입니다. … 식민지로서 그곳을 지배하던 일본인 자손의 한 사람인 제가 그곳에서 추방된 것에 이의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추방됐다고는 생각해도 결코 그곳을 빼앗겼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1967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한 소설 ‘이조잔영’의 원작자 가지야마 도시유키(1930∼1975)도 빼놓을 수 없다. 이조잔영은 1919년 3·1운동 때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가지야마는 1961년 ‘사상계’를 이끌던 장준하 선생(1918∼1975)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귀국을 식민지로 삼던 시대의 죄를 도려내서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신 교수는 식민자 2세 작가들의 공통점으로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꼽았다. 이미 성인으로 한반도에 살았던 기성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그 시절을 그립다 말하는데, 이들은 그마저도 조심스러워했다. 고바야시는 생전 마지막 에세이 ‘그립다고 해서는 안 된다’에서 안일하게 고향을 추억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신 교수는 “그들이 식민지 체험을 소재 삼아 작가적 입지 확립에 ‘이용’한 사실은 비판할 대목이나 작품에서 드러나는 진정성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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