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체구의 이춘희 명창이 경기민요를 부르기 시작하자 청아한 소리가 가득 퍼졌다. 그가 라디오프랑스와 함께 제작한 ‘아리랑과 민요’ 음반이 올해 1월 세계 60여 개국에 출시됐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12년 12월 5일 오후 10시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인 이춘희 명창(67)이 부르는 맑고 청아한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유산 최종 심사 과정에서 울려 퍼졌다. 문서와 자료화면 위주의 심사에서 이 명창이 실연으로 ‘아리랑은 바로 이것’이라는 걸 보여준 것.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데 공을 세운 이 명창의 아리랑이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인 7, 8일 다시 파리에 울려 퍼진다. 프랑스가 해외 전통 무형문화유산을 소개하기 위해 1997년부터 개최해온 ‘상상축제’ 개막작으로 ‘아리랑’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외국문화 유치를 위해 프랑스 정부가 세운 ‘세계문화의 집’이 마련한 행사다. 세계문화의 집과 지난해 업무 협약을 맺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아리랑을 올해 상상축제 개막작으로 제안한 것이 성사됐다.
이 명창은 1시간 20분 남짓의 아리랑 공연에서 밀양아리랑과 강원도아리랑, 유산가, 이별가 등을 부른다. 이 곡들은 대부분 경기민요로 분류된다.
최근 만난 이 명창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해외 공연에서 경기민요는 판소리에 가려 언제나 ‘양념’처럼 소개됐어요. 경기민요가 메인으로 구성된 공연은 처음이에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이 많이 돼요.(웃음)”
이 명창은 ‘국악=판소리’로 인식되는 데 대해 아쉬워했다.
“판소리는 호남지방 소리예요. 소리에 연기가 결합되고 우람하고 남성적이죠. 길이도 4시간 이상 되고요. 서울, 경기지역에서 불리던 경기민요는 대개 1분 정도로 길이가 짧고 노래만 불러요. 투명하고 맑고 경쾌한 게 특징이죠.”
한 이동통신사 광고에서 송소희 양이 부르는 건 판소리가 아니라 경기민요다. 이 명창은 송 양 덕분에 경기민요가 알려지게 된 것을 반가워했다.
“경기민요는 섬세해서 배우기가 진짜 어려워요. 50년간 소리를 했지만 안 되는 날이 많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듣기는 참 좋죠. 중독성이 강해 한번 들으면 귀에 쏙쏙 꽂힌답니다.”
경기민요는 과거 서민들이 쉽게 흥얼거리곤 했지만 차츰 잊혀져갔다.
“술집에서도 흥이 나면 아가씨들이 경기민요를 즐겨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경기민요는 천박한 노래로 치부됐어요. 하지만 술 마시면서 케이팝을 불러도 천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이 명창은 경기민요에 이야기를 엮어 만든 소리극이 판소리로 만든 창극처럼 대중화되길 희망하고 있다. “경기민요는 들을수록 매력적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맛보게 하고 싶어요. 아리랑 공연을 통해 프랑스에 경기민요의 여운을 깊이 남기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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