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그리운 제주성산포 앞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눈먼 자들의 세상.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스멀스멀 하늘과 바다를 유령처럼 가득 메웠다. 성산일출봉도 아슴아슴 도깨비처럼 엉거주춤 저만치 서 있었다. 파도소리만 쏴아! 밀려왔다가, 순식간에 쑤욱! 사라져갔다. 간혹 햇살이 빗살무늬마냥 미세먼지 틈새로 주르륵 발을 내밀었다가, 앞니에 국수발 끊기듯 한순간에 우두둑 동강나버렸다.
그래도 노란 유채꽃은 어김없이 피었다. 샛노란 물감이 거무튀튀한 묵정밭에 사정없이 뿌려졌다. 성산포 해안가 검은 발톱을 노랗게 물들였다. 유채밭 주인은 ‘지난해 말부터 피워냈다’고 말했다. ‘제주도내에선 자신만큼 일찍 꽃을 피워낸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산방산 부근의 한두 유채밭은 이제 겨우 핀 것이며, 꽃도 영 보잘것없다’고 덧붙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 일찍 꽃을 피웠을까. 비닐하우스로 피워낸 건 아닐까. 주인은 펄쩍 뛰었다. 품종이 다르다는 것까지만 알려주겠다며 쉿!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의 유채밭엔 관광객이 차고 넘쳤다. 한사람에 1000원. 봄은 그렇게 헐값에 팔리고 있었다. 기상청은 ‘이달 14일쯤 서귀포에 개나리꽃이 필 것’이라고 예보했다. 진달래꽃은 그 하루 이틀 뒤에 꽃이 벙글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쨌거나 제주엔 이미 봄이 우우우 돋아나고 있었다. 연한 쑥이 꼬무락대며 올라오고, 꿀벌들이 입장료도 없이 잉잉거리며 유채꽃을 탐하고 있었다. 쇠똥 말똥냄새가 구수하게 코끝을 달싹이게 하고, 각진 검은 돌담 안의 푸른 보리밭이 바람에 부르르 일렁거리곤 했다.
돈내코 계곡엔 눈 녹은 물이 졸졸졸 흘러내렸다. 제주사람들이 말하는 ‘간세다리(게으름뱅이)’처럼 ‘꼬닥꼬닥(조금 느리게)’ ‘늘짝늘짝(느릿느릿)’ 혹은 ‘느랏느랏(아주 느리게)’ 한라산에 오르는 맛은 그만이었다. 배고픈 고라니와 노루들이 산자락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을 보아도 멀뚱멀뚱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배가 너무 고파 도망갈 힘이 없는지도 몰랐다. 식구들은 많은데 이 험한 보릿고개를 어찌 넘길까.
그 많던 까마귀들도 소리에 힘이 없었다. “과악 과아∼악” 울어대던 한라산의 큰부리까마귀 울음소리가 뜸했다. 독수리처럼 길고 두툼한 까마귀의 부리. 머리와 부리가 직각이고, 검은 깃털에 기름이 자르르하던 한라산까마귀. 그놈들은 이 춘궁기를 어떻게 견뎌낼까.
봄은 시나브로 도둑처럼 슬금슬금 한라산 꼭대기까지 한 발짝 한 걸음 올라가고 있었다. 꽁꽁 껴입은 겨울갑옷을 까르르 까르르 간지럼 밥 먹이며 하나씩 둘씩 벗겨내고 있었다. 역시 봄은 ‘보는 것’이었다. 꽃도 보고, 하늘과 바다도 보고, 눈꽃 핀 한라산 꼭대기도 보고….
▼ 산 아래는 핏빛 동백꽃, 산마루엔 하얀 눈꽃숭어리 ▼ 3월 한라산의 색다른 매력
한라산(1950m)은 ‘두무악(頭無岳)’이다. ‘머리 없는 산’이다. 제주설화엔 ‘한라산 꼭대기가 거센 바람에 잘려나가 서귀포 쪽으로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산방산(395m)이 그 떨어져 나간 봉우리라는 것이다.
요즘 한라산은 위쪽은 하얀 눈꽃, 그 아래엔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졌다. 봄과 겨울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위로 오를수록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다. 동백꽃은 해발 200∼300m 지점까지, 모가지가 통째로 떨어져 땅바닥에 핏빛으로 나뒹군다. 그 아래 거무튀튀한 논두렁 밭두렁엔 하얀 수선화가 한창이다. 마을돌담 아래에도 옹기종기 구물구물 피어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대정읍에서 8년 3개월(1840∼1848)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제주사람들이 논밭의 수선화를 잡초처럼 뽑아버리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호미 끝에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캐버린 것을 책상 앞에 고이 옮겨심기’까지 했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입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있는 듯합니다.’
한라산 눈밭은 대략 해발 1000m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쯤부터 구상나무가 지천이다. 눈밭에 발목이 슬슬 빠지기 시작한다. 더 오르다보면 구상나무 푸른 바늘잎에 얼음꽃(상고대)이 꼬마전구처럼 매달려 있다.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가 버무려져 앞이 안 보일 때가 많다.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토종나무.
제주엔 오름이 360여 개나 봉긋봉긋 솟아있다. 오름은 기생화산(새끼화산)을 말한다. 가운데 큰 달항아리(한라산) 하나에, 빙 둘러 고만고만한 고추장 옹기, 백자요강, 씨앗 독들이 올망졸망 엎드려있다. 그 부드러운 선이 여인의 둥근 엉덩이 같기도 하고, 젖가슴 같기도 하다.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은 생전에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을 볼 때마다 오르가슴을 느껴 혼이 나갈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나, 안개가 짙고 가랑비가 내리면 미친 듯이 오름으로 내달렸다. 폭설이 내려도, 무지개가 떠도, 오름으로 달려갔다. 그는 오름이 웃고, 울고, 수다 떠는 소리를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한라산은 해발 1700m 부근까지는 대체로 완만하다. 그 이후부터 삐죽삐죽한 돌 성곽이 우뚝우뚝 에둘러 서 있다. 크라운 모양의 백록담 분화구벽의 웅장한 모습이다. 마치 ‘해수관음탑(오세영 시인)’ 같기도 하고 ‘국토신(國土神)의 이궁(離宮·구상 시인)’ 같기도 하다. ‘단군이 한라산에 와서 잠시 머물던 궁전’이라는 것이다. 백록담 분화구벽 둘레는 1.7km, 면적은 6만3600여 평(0.21km²)이다.
백록담 분화구 남벽은 장엄하다. 깎아지른 수직 벽이다. 남벽은 서귀포 돈내코 계곡으로 오른다.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서귀포시가 가뭇가뭇 발아래 누워 있다. 왼쪽부터 섶섬 문섬 새섬 범섬 4개의 무인도가 아득하다. 요즘에는 미세먼지와 안개 때문에 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아쉽다.
▼ 어리목 성판악 코스 북적, 관음사 돈내코 코스 한산 ▼
한라산 오르는 데는 5개 코스가 있다. 이 중 어리목, 성판악, 영실코스를 많이 찾는다. 관음사나 돈내코 코스는 상대적으로 발길이 뜸하다.
어리목의 ‘어리’는 어름소(빙潭)의 ‘어름(얼음)’이 변해서 된 말. ‘목’은 ‘통로’를 뜻한다. ‘얼음통로’ 정도로 뜻풀이 하면 되겠다. 성판악(城坂岳)은 ‘성널오름’이다. ‘성 쌓는 돌 모양의 오름’이란 의미다.
영실(靈室)은 ‘산신령이 사는 방’이다. 이곳엔 500장군바위가 있다. 이 기암들은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 여신의 오백아들로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왼발은 북쪽 제주앞바다의 관탈섬에, 오른발은 동쪽 성산일출봉에 걸치고 잠잤다는 거인이다. 몸집이 어마어마해서 할망이 털어낸 흙이 오늘날의 오름이 됐다고 한다.
돈내코는 ‘멧돼지들이 물을 먹었던 내(川)의 들머리’라는 뜻. 돈은 ‘돗(돼지)’의 한자어이고 ‘내’는 하천, ‘코’는 ‘입구’이다. 돈내코 계곡을 흐르는 냇물이 효돈천(孝敦川)이다. 효돈천은 서귀포앞바다 쇠소깍에서 바닷물과 몸을 섞는다. 올레길 6코스(쇠소깍∼외돌개) 출발점이기도 하다. ‘쇠’는 효돈 마을을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소’는 ‘웅덩이’이고 ‘깍’은 ‘끝’을 뜻하는 ‘각’의 된소리. ‘쇠마을 끝 웅덩이’라고나 할까.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뜻. 가장 위쪽 큰 오름이 붉은 오름(1740m), 가운데 오름이 누운 오름(1711m), 가장 아래가 족은 오름(1699m).
■Travel Info
▼교통
요즘 서울∼제주 항공편은 만원. 신혼여행객에 일반관광객까지 겹쳤다. ▽제주∼서귀포는 600번 공항리무진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일반버스는 공항에서 200번, 300번 좌석버스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서귀포행 버스를 타야 한다.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064-739-4645).
시내버스는 띄엄띄엄 있을뿐더러 시간도 부정확하다. T-money plus 카드(수도권에선 GS25 편의점에서 구입 가능) 사용 가능. 3명 이상이 팀을 이뤄 콜택시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먹을거리=제주 음식은 담백한 게 특징. 고춧가루 마늘 등 양념을 많이 쓰지 않는다. 돼지고기, 갈치, 고등어 요리에 각종 생선회가 주축. ‘소는 제주 전체 하루 2마리밖에 도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쇠고기는 거의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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