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죽음을 기억하라” 종말을 경고하는 선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1일 03시 00분


파리 신문에 실린 베를리오즈 생전 지휘 모습.
파리 신문에 실린 베를리오즈 생전 지휘 모습.
1월 23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회를 보러 갔습니다. 협연자는 이 악단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였죠. 코른골트의 협주곡을 화려하게 연주한 뒤 그는 청중의 환호에 앙코르로 화답했습니다. 두 번째 앙코르곡에서 익숙한 선율이 귀를 붙잡았습니다. 도-시-도-라-시-솔-라. 아하.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입니다. 그런데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마지막 악장에도 나옵니다. 이 밖에 리스트의 피아노곡 ‘죽음의 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차이콥스키 ‘만프레드 교향곡’…. 일일이 꼽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멜로디가, 여러 대가의 작품 속에 반복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선율은 원래 중세 성가 중 진혼미사(레퀴엠)의 부속가(시퀀스) 시작 부분입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노의 날, 다윗과 시빌이 예언한 바와 같이 세상은 재로 변하리라.’ 무서운 가사를 통해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이런 ‘세상 끝날’의 경고에 매혹되었습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 선율을 흘리면 ‘인간아,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그너는 19세기 말 그의 음악극에서 특정 선율이 나오면 일정한 주인공을 상징하도록 한 ‘시도동기(Leitmotiv)’를 창안했지만 성가 ‘분노의 날’ 선율은 이보다 앞서 여러 작곡가를 통해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는 시도동기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세 성가의 텍스트에는 복음과 구원의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유독 멸망과 죽음을 형상화한 선율이 널리 퍼져나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도 정답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인간의 속성 자체가, 죽음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프랑스 근대음악의 대가 미셸 플라송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지휘합니다. 마지막 악장은 주인공이 환상 속에서 마녀들의 광란에 뒤섞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악장에서도 ‘분노의 날’ 선율이 인상 깊게 쓰입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외젠 이자이#바이올린 소나타 2번#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멸망#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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