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길언(74)은 현기영(73)과 더불어 대표적인 제주 출신 소설가로 꼽힌다. 이들에게 바람 부는 고향 제주는 창작의 토양이었고, 동시에 4·3사건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문학으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안겨줬다.
현길언의 소설집 ‘누구나 그 섬에 갈 수 없을까’(물레)가 최근 나왔다. 고향에 대한 원초적 심상을 섬이라는 공간을 통해 풀어낸 단편 6편을 엮었다. 10일 만난 작가는 말했다.
“일흔 즈음되면 세상이 하찮게 보입니다. 인생이라는 그 자체가 말이지요. 욕망이나 가치를 향해 쉴 틈 없이 달려왔는데,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건 자그마한 이익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살았던 것….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나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고향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더군요.”
섬에 살면서 육지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섬을 떠나 육지에 산다 해서 육지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작가는 그런 그들을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그린다.
‘누구나 그 섬에 갈 수 없을까’의 성균은 재야 변호사로 활동하다 서울 지역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지만 자신이 ‘청해도’(제주도를 빗댄 가상의 섬) 출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나’도 죽음을 앞두고 우도에 머물며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다.
“1986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내가 살았던 섬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섬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이 소설 속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더군요. 누구나 고향을 잘 안다고 하지만 제대로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붙잡아두려고 해도 고향은 나와 상관없이 변해가고, 그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요.”
그에게 소설을 쓰게 한 것은 4·3사건이었다. 1948년 4월 남로당의 무장공세로 시작된 4·3사건은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최대 3만 명(정부 공식보고서)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작가는 남원읍 수망리에 살다가 20여 일간 식구들과 피난살이를 했다. 작가는 장편 ‘한라산’, 단편 ‘껍질과 속살’ ‘우리들의 조부님’ ‘미명’에서 4·3사건을 다뤄왔다. 이번 소설집에도 4·3사건을 그린 ‘섬을 떠나며’가 실렸다. 작가는 4·3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구성한 책을 준비 중이며, 장편소설로도 다시 한 번 써내려갈 계획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시기가 소년 시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 가까운 친척들이 4·3사건으로 화를 당했습니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를 오래도록 입에 올렸지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평범한 이들의 아픔,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해 내가 꼭 써야겠다는 다짐을 품었다가 결국 마흔에 등단했습니다.”
작가는 제주대에서 한양대(국문과 교수)로 옮겨 정년퇴임한 뒤 2005년 학술계간지 ‘본질과 현상’을 창간해 지금껏 꾸려오면서 소설 쓰기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대와 40대, 70대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를 텐데 우리 문단에서는 노년의 문학에 관심이 덜해 아쉽습니다. 지금까지도 소설을 붙들고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나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소설을 쓰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끝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고통이자 기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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