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許는 크게 웃는 소리… 札冷은 물결치는 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0일 03시 00분


조선의 10대, 의성-의태어로 언어격차 줄였다
김동준 이대 교수 논문

천자문을 뗀 다음 소학을 읽으며 인간 도리를 배우고,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에서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익힌다. 시경(詩經)을 통해서 문학적 감수성을, 서경(書經)을 읽으며 역사를 보는 안목을 기른다.

우리 머릿속에 그려지는 조선 양반가 자제의 독서 과정이다. 하지만 이들이 소년기에 읽은 책들이 비교적 상세히 알려진 데 비해 이 시기 어떤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성년이 된 뒤 어릴 때 쓴 글은 ‘유치하다’며 없애거나 문집에 싣지 않아서다.

김동준 이화여대 교수(국문학)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학술지 ‘민족문화연구’ 최신호에 실은 논문 ‘성장기 신후담(愼後聃)의 지적 욕망과 하빈잡저(河濱雜著)’에서 분석한 하빈 신후담(1702∼1761)은 이런 풍토에서 볼 때 이색적인 인물이다. 남인 계열 사대부로 평생 관직을 하지 않고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학문만 연마했던 신후담은 자신이 10대 때 지은 글을 자신의 문집 하빈잡저에 모두 실었다. 그가 남긴 글은 동시대를 산 양반가 10대들의 지적 성장 과정과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그가 14세 때 쓴 ‘속설잡기(俗說雜記)’와 ‘중뢰통설(衆(뇌,뢰)通說)’을 살펴보자. 하빈은 여기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의성·의태어에 주관적 인상을 더해 한자로 표현하고 쓰임새를 정리했다. “‘찰랑(札冷)’은 물이 바위를 살짝 치는 소리”(중뢰통설)라거나, “‘허허(許許)’는 크게 웃는 소리”(속설잡기) 같은 식이다. 김 교수는 “입으로는 모국어를 말하면서도 글은 한문으로 써야 했던 이중언어 환경에 처한 조선의 10대가 두 말 사이의 격차를 좁히려 했던 시도”라며 “의성·의태어를 한자어와 대응시킨 글은 조선조를 통틀어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소년 신후담은 조선의 토착 문물과 지리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14세 때 쓴 ‘동식잡저(動植雜著)’에는 “개(犬)는 속칭 개(介)라고 하는데 주인과 손님을 분별할 줄 아는 절개(介)가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라며 동식물 이름의 유래를 정리했고, 같은 해에 쓴 ‘물외승지기(物外勝地記)’에선 지리산 만수동, 속리산 이화동 같은 조선의 명소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다. 농부에게 직접 물어 얻은 정보로 벼, 보리 등 곡물 종자 수백 종의 색과 형태, 경작 시기를 정리해 ‘곡보(穀譜)’라는 글도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 신후담의 글쓰기 욕망을 자극했던 지식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신후담은 18세가 되면서 지난 시절의 관심은 ‘너저분한 지식’이었다며 유학 경전 속에 진짜 지식이 있다고 믿게 됐다. 천주학 비판에도 앞장섰다. 부친과 스승의 검열, 통치계급의 일원이 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김 교수는 “하빈의 선택은 당대 사대부가 자제의 평균적인 경향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며 “그가 기존의 지식세계와 통치체계에 순응으로 돌아서면서 10대 때 가진 유연한 사고와 비판의 힘도 함께 후퇴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김동준#의성-의태어#민족문화연구#신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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