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시인에게 달은 거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만의 달을 띄우고 이름을 붙인다면 어두운 사막 같은 이 세상을 슬기롭게 건너갈 수 있을 거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영국 런던의 낡고 오래된 호텔에서였다. 창가에 놓인 타자기에 달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심코 자판을 하나 누르니 ‘탁!’ 소리와 함께 달빛이 튕겨 나오며 휙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한동안 시를 못 쓰고 있던 시인의 가슴에 시적 상상력이 돋아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쭉꽃이 환하게 핀 봄밤이었다. 마당에 서서 머리 위에 뜬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시인은 와락 눈물이 났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우리는 묘하게도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가 아닌가. 달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 존재의 비밀들을.》
권대웅 시인(52)은 그때부터 달로 시를 지었다. 시를 쓰다가 달도 하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집, 코끼리 따위도 넣어보았다. 그가 지난 1년간 빠져든 달 시와 그림, 시에 미처 담지 못한 말을 적은 산문을 묶어 ‘당신이 사는 달’(김영사on)을 펴냈다.
“처음에는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風葬)’에서 착안해 ‘월장(月葬)’이라는 시를 썼다. 달에 묻어줘, 달에게로 가리…이런 마음이었는데 쓰다 보니까 달 하나에 담긴 것들이 무지무지 많았다. 달은 자연의 편지이고 기러기는 달의 문장이다.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해 무한한 상상력이 달에 있더라.”
권대웅 시인이 직접 쓰고 그린 ‘달빛바느질’ 시화. 김영사 제공‘그리운 것들은 모두 달에 있다/ (중략) 달빛이 마당에 쓰는 편지를 읽는 귀뚜라미/큰 집에 켜진 불빛처럼/나뭇가지 위에 휘영청 찾아와/그리운 날들 모두 어루만져주고 가는/저 달/하늘색 나무대문집에서 바라보던.’(‘달의 마음’)
상도동 언덕배기 2층 단독주택에 사는 시인은 지난해 내내 오후 4시쯤이면 뒷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면서 달 시의 첫 문장을 생각했다. 하산해서 목욕재개한 뒤 맑은 정신으로 시를 썼다.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정겨운 손 글씨, 소박하면서 정성스러운 그림에 담긴 달 이야기를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다. 여행을 즐겨온 시인의 귀국길에는 언제나 이국의 문방구가 함께했다. 달 시를 쓰면서 그간 수집해온 이탈리아의 펜, 인도 종이, 체코에서 산 색연필을 꺼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페이스북에 달 시를 올리면 수십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외롭고 두렵고 힘든 이들이 참 많다는 걸 알았다. 생면부지의 여인이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죽을 것 같은데 달 시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영국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가 달 시를 영역하고, 번역가 백선희는 프랑스어로 번역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외국인들에게도 이 시를 알리고 싶다고.”
‘당신과 살던 집에 가고 싶었지요. 둥근 달 속에 있는, 저녁이면 둥근 종소리가 별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주던 집. (중략) 불을 켜지 않아도 외로움마저도 환했던 집.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더 아름다웠던 저 달의 집.’(‘달에서 살던 집’)
이번 책을 내면서 출판사 측과 지인들은 출판기념회나 북 콘서트를 하자고 했다. 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다음 달 4∼6일 서울 인사동길 갤러리 시작에서 그동안 그린 시화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수익금으로는 월세로 사는 달동네 홀몸노인들을 돕는다. 개막식에서 시인이 달 시를 낭송하고, 서양화를 그리는 친구가 해금으로 ‘문 리버’를 연주하며, 참석한 이들과 달떡을 나눠 먹을 계획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본다. 하지만 밤에 돌아와서 마음의 거울은 보지 않는다. 달은 밤의 거대한 거울이다. 달은 언제나 따뜻하고 밝고 환하고 둥글다. 작은 존재들을 쓰다듬는 달, 그 달이 우리에게 인생의 답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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