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어떤 여행이든 이것만은 똑같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다. 그런데 이것 역시 똑같다. 여행은 고되다는 것이다.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며칠이나 갈까. 사람들은 또다시 여행을 꿈꾼다. 왜? 이 답 역시 같다. 새로운 걸 찾아서다. 새로움이란 곧 깨침이요, 깨침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알지 못했던 뭔가를 알게 될 때 느끼는 희열, 그게 요체인데 그거야말로 우릴 끊임없이 여행으로 이끄는 동인(動因)이다. 그러니 당신이 살아있다면 숨을 쉴 것이요, 숨을 쉰다면 생각할 것이고, 생각한다면 질문할 것이고, 질문한다면 찾을 것인데, 여행은 거기서 시작된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시작됐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가장 일본다운 여행은 무엇일까. 답은 쉽게 나왔다. ‘유키미자케(雪見酒·눈을 보며 마시는 술)’다. 눈이 펄펄 내리는 산중 온천료칸의 로텐부로(노천욕장)에 몸을 담근 채 멋진 설경을 감상하며 ‘사케(酒)’라 불리는 세이슈(淸酒·청주)를 음미하는 것이다. ‘온천-료칸-사케’, 나는 일본 여행의 요체인 이 셋을 찾아 여행을 기획했다. 장소는 국도 41호선(나고야∼도야마)이 관통하는 주부(中部) 지방의 기후와 아이치 현. 나고야(아이치 현)∼히다∼다카야마(기후 현)∼나고야∼지타 반도(아이치 현)로 나흘간 유명 온천마을의 료칸 세 곳과 품격 있는 사케를 만드는 유서 깊은 사카쿠라(酒藏·양조장) 네 곳을 찾는 것이었다. 》
‘산킨코타이’로 태동한 환대서비스
저마다 독특한 일본의 지방색. 260여 개 번(藩)의 다이묘(大名·지방영주)가 나눠 통치하던 봉건제도의 산물이다. 1박2식을 제공하는 료칸(旅館) 역시 그렇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에도(현재의 도쿄)에 자리 잡은 최고권력자 쇼군(將軍)의 막부 통치기(1603∼1868)에 발달했다. 그 기반은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지방 다이묘가 에도에 의무적으로 정주(한 해 걸러 1년씩)토록 한 제도다.
180여 개 번의 다이묘는 정기적으로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오갔는데 길게는 몇 달씩 걸렸다. 경비 또한 막대했다. 막부가 노린 건 그것. 재력을 소진시켜 대항할 힘을 줄이는 책략이다. 에도 정주는 인질의 성격도 있었다. 당시 다이묘 행렬의 규모는 수십∼백수십 명. 가도에 이들을 위한 숙식시설이 들어선 건 물론이다. 그중 다이묘 전용숙소를 ‘혼진(本陣)’이라 불렀는데 이게 현재 료칸의 전형이다.
료칸 숙박엔 음식(1박2식)이 포함돼 있다. 당연히 음식도 함께 발전했는데 그게 가이세키(會席)라 불리는 최고급 코스 요리다. 에도에 있는 각 다이묘의 거처 역시 극진한 환대서비스의 개발현장이었다. 다이묘 간에 세를 과시하느라 경쟁적으로 그 수준을 높인 덕분이다. 음식에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사케도 더불어 발전한 건 당연지사.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해온 일본의 술과 음식, 극진한 환대문화는 현재 온천에서 그 꽃을 피우고 있다. 고급스러운 전통 료칸이 그것이다.
게로 온천과 다카키슈조
여행은 나고야 시(아이치 현) 남부 지타 반도의 주부국제공항에서 시작됐다. 첫날 목적지는 일본 3대 온천에 꼽히는 나고야 북쪽의 게로(下呂)온천(기후 현). 도중 마고메(馬籠·기후현 나카쓰카와 시)에 들렀다. 나가노와 도야마 현 지역의 다이묘가 에도로 갈 때 지나던 나카센도(中山道)의 67개 숙박촌 중 하나(47번째)로 당시 모습이 잘 보존돼 있어 찾는 이가 많다. 난 여기서 산중명물로 소문난 소바(메밀국수)로 점심식사를 한 뒤 7년 전 전국술품평회에서 1위를 차지한 다카키슈조(高木酒造·게로 시)로 향했다.
다카키슈조는 294년 전 창업한 그 자리에서 여전히 같은 물(50m 지하수)로 술을 빚는 뚝심 있는 술도가다. 고색창연한 사카쿠라(양조장 건물)는 110년 전 이축한 것. 실내 전시 중인 200년 전의 술 매출 장부가 이 술도가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사장 다카키 지히로 씨는 가업 11대째. 젊은 시절에 백제역사를 전공해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이곳에선 56년 전 부친이 개발한 보드카도 생산 중이다. 쌀로 빚은 보드카로는 세계 최초란다. 이곳에선 100종이 넘는 사케를 사철 생산 중인데 미국 홍콩 싱가포르 등에도 수출한다. 이 집의 고급주는 과일향이 일품이다.
게로 온천은 아리마(有馬·효고 현) 구사쓰(草津·군마 현)와 더불어 일본 3대 명천(名泉)에 드는 유서 깊은 온천마을이다. 온천타운 한가운데로 히다 강이 흐르는데 예약한 료칸 스이메이칸(水明館)은 강변에 있다. 게로의 온천수는 감동적이다. 몸을 담그는 순간 올리브오일이 전신에 도포되는 느낌이다. 미끌미끌한 피부를 문지르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미 세 번째 방문인데도 게로에서의 휴식은 늘 특별하다. 수질도 수질이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레 정비된 온천거리도 한몫한다. 다리 아래 둔치엔 무료 노천탕도 있다. 이 혼탕은 밤에 이용객이 많다고 한다. 다카야마의 료칸, 히다의 사케
이튿날 목적지는 북쪽 히다 지역의 중심도시 다카야마(高山)시. 2000∼3000m급 험준한 고산의 한가운데 있는 도시로 좋은 목재와 실력 있는 목수로 이름났던 곳이다. 에도 막부가 177년 동안 직할영지로 삼은 건 그 때문. 이곳 나무를 가져와 세금 대신에 공역(100명이 매년 250∼300일씩)을 제공하는 목수에게 집과 절을 짓도록 했다. 그 목수 덕분에 이곳 역시 에도 모습을 띠었다. 그게 ‘리틀 교토’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자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이다. 예스러운 골목 산마치(三町)가 그 중심인데 각종 상점이 즐비하다.
다카야마의 양조장 8개도 이 산마치에 있다. 하지만 내가 찾은 곳은 근방의 산중도시 히다(해발 600m)에 있는 와타나베슈조. 히다의 도우지(杜氏·양조장인)가 ‘히다 호마레(향토 주조미)’로 술을 빚어 ‘호우라이(蓬萊)’라는 브랜드로 판매(총 60종)하고 있다. 창업은 1879년. 2005년 국제술품평회에서 와타나베슈조가 만든 다이긴조(60% 이상 깎아낸 쌀로 빚은 고급주)가 100점 만점에 94점을 기록했다. 몇몇 술은 히다 지역의 신문폐지로 포장해 판매할 만큼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다. 여기서 8년째 도우지 수업 중인 미국인 대릴 코디 브레일스포드 씨도 인상적이었다. 유타 주 출신의 운동치료사인 그는 일본인 부인의 고향인 히다에 정착하며 양조기술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날 찾은 온천료칸은 다카야마 시내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47년 역사의 이야마(飯山). 히다의 목수가 거대한 느티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천장을 높여 만든 전통목조 건물인데 객실이 17개뿐인 부티크 료칸이다. 온천수는 게로처럼 피부의 매끈거림이 뛰어난 알칼리성. 로텐부로도 크기는 작지만 느낌이 좋았다. 산촌의 풍미가 깃든 가이세키 요리도 훌륭한데 일본 3대 와규(和牛·일본 소고기)에 드는 히다규 호바 미소구이(풍로 위에 후박나무 낙엽을 깔고 토속된장을 발라 굽는 것)가 특히 그랬다. 오카미(女將·여자총지배인)는 이야마가(家)에 시집온 이야마 도모미 씨. 그녀는 “이런 작은 료칸이야말로 ‘오모테나시’(일본 특유의 극진하고 세심한 접객태도)를 느끼기에 좋지 않을까싶다”고 말했다.
이세(伊勢) 만의 료칸과 사카쿠라
여행 사흘째. 온 길로 되돌아가 지타 반도로 향했다. 묵을 곳은 이세 만(아이치와 미에 두 현에 둘러싸인 바다) 해안의 전통료칸 가이후(海風). 한적한 해변의 7층 건물내부는 온통 삼나무를 이용한 전통목조로 꾸며져 있었다. 번뜩이는 옻칠가구에 벽과 천장이 모두 그림으로 장식돼 있어 한눈에도 최고급 료칸임이 느껴졌다. 기품 있는 60대 후반의 오카미 에노모토 유코 씨와, 연배가 비슷한 나카이(여종업원)의 노련한 일처리에서 전통미가 우러났다. 더불어 눈을 사로잡는 것은 아리타(有田·사가 현의 이름난 도자기마을) 화병이 놓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세 만(灣)의 바다. 파도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하지만 감탄하긴 일렀다. 가이후 최고의 매력이라는 옥상의 로텐부로를 보기 전까지는. 거기 오르니 눈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바다는 200도 이상, 하늘은 360도로 파노라마 뷰가 펼쳐진다. 더이상 높은 곳도 주변엔 없다. 노천욕장으론 최적의 조건이다. 탕 안에 몸을 담근 채로도 바다를 볼 수 있다. 한밤엔 달과 별, 항공기의 야간비행모습까지 즐긴다. 한 가지 더. 혹시 젊은 여성이 맨몸으로 로텐부로에 들어오더라도 놀라지 마시길. 혼욕탕이므로.
이튿날은 지타 반도의 사카쿠라 두 곳을 찾았다. 먼저 간장과 된장, 술 등 발효식품을 두루 생산하는 모리타(盛田)슈조를 찾았다. ‘레노히’라는 브랜드로 사케를 출시하는 모리타슈조는 1635년 창업한 유서 깊은 기업. 16대째 대물림하고 있다. 양조장은 도코나메 시 바닷가에 있는데 자사의 된장 간장으로 조리한 음식과 더불어 술을 맛보는 미식 체험관 ‘모리타 아지노야카타(盛田 味の館)’도 운영한다. 거기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 씨의 대형사진이다. 그는 이 가문의 15대 장손. 장남이 소니를 창업하자 술 빚는 가업은 차남에게 승계됐다.
다음은 나카노슈조. 사케문화관을 운영하며 ‘구니자카리(國盛)’라는 브랜드 술을 만든다. 공장은 한다(半田) 시 운하변에 있다. 이 회사는 부근에 남아 있는 200년 전 사카쿠라를 활용해 양조과정을 소개하는 술 문화관으로 운영 중이다. 이곳의 오하시 아키히로 관장은 “한다 시는 200년 전(에도시대)에 양조장 80개가 운집했던 양조장 거리”라고 소개하며 “쌀과 물과 인력이 풍부한데다 운하를 기반으로 해운업까지 발달해 양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소개했다. 이 양조장의 술 ‘구니자카리’는 향토주조미 ‘와카미즈(계약생산)’로 빚어 맛을 차별화하고 있다.
■Travel Info
항공편:인천∼나고야는 아시아나항공 매일 운항(1시간 40분 소요).
온천료칸:◇기후 현 ▽게로온천:나고야∼게로는 JR다카야마혼센으로 1시간 반 소요. △수이메이칸: www.suimeikan.co.jp ▽다카야마 시:나고야∼다카야마는 JR다카야마혼센으로 2시간 10분 소요. △이야마: ‘하나오우기’라는 료칸의 별관. www.hanaougi.com ◇아이치 현 ▽미나미치타 초:나고야∼우쓰미(內海) 역은 메테쓰(名鐵) 지타신센(특급열차)으로 55분 소요. ▽슈쿠(肅) 가이후: 우쓰미 역에서 차로 5분 거리.
사케양조장:◇기후 현 ▽게로 시 △다카키슈조: 브랜드 ‘다카키(高木)’ 0576-32-2033 ▽히다 시 △와타나베슈조:브랜드 ‘蓬萊(호우라이)’. JR특급으로 나고야에서 2시간 반 소요. www.sake-hourai.co.jp ◇아이치 현(지타 반도) ▽도코나메 시 △모리타슈조:브랜드 ‘레노히’. 0569-37-0733 ▽한다 시 △나카노슈조:브랜드 ‘구니자카리(國盛)’. www.nakanoshuzou.jp. 사케문화관(무료)은 오전 10시 개관전화예약 0569-23-1499
나고야:쇼류도(昇龍道) 관광의 중심. 쇼류도는 나고야 시 및 아이치 기후 미에 현 등의 주부(中部)지방과 이시카와 도야마 나가노 현 등의 호쿠리쿠(北陸)지방 등 9개 현으로 구성된 지역. www.centerair.jp/shoryudo/2014 http://go-centraljapan.jp/en/ ▽나고야관광: www.ncvb.or.jp/en/ ◇명물 먹을거리 ▽야바돈(矢場とん):나고야의 명물인 미소(일본된장)로 소스를 만들어 뿌려 먹는 돈가스. 주부국제공항 4층 식당가에도 있다. 일본여행:여행지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일본관광청이 추천하는 ‘제이루트’(www.jroute.or.kr)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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