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온릉(溫陵). 햇살은 따습다 못해 따가웠다. 아직 잔디는 푸른빛도 찾기 힘들건만. 단출한 봉분 앞 혼유석(魂遊石) 아랜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 겨우 7일 만에 왕비에서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를 토닥이는 걸까. 봄기운은 이미 흠뻑 산자락에 내려앉았다.
“정말 근사하죠? 한데 할 일이 태산이에요. 얼른 서두릅시다.”
조동진의 ‘제비꽃’ 한 소절 떠올릴 틈도 없이, 조선왕릉관리소의 최길섭 수리복원팀장은 어깨를 툭 쳤다. 괜스레 무안해 둘러보니 잠시 넋 놓은 건 혼자뿐이었다. 점검반은 벌써 정자각(丁字閣)으로, 능 뒤편으로 흩어져 체크하기 바빴다.
문화재청이 조선왕릉 일체 안전점검에 나선 게 이날로 6일째. 해빙기 사고 예방조사는 해마다 실시하는 정례사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좀 특별하다. 처음으로 민관합동점검을 실시해 대한건축학회나 산림보호협회와 같은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허복수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장은 “외부인사들이 기탄없이 의견을 내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 지난 이맘때가 왕릉은 손이 많이 간다. 봉분은 얼음이 녹으며 구석구석 무너져 내렸다. 지붕 일부가 뭉개진 건조물도 눈에 띄었다. 먹을 게 없는 산짐승이 내려오는 것도 이 시기다. 실제로 최근 경기 여주시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멧돼지와 두더지 출몰로 골머리를 앓았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온릉에 동작 감지 센서가 달린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설치된 이유이기도 하다.
온릉을 거쳐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과 서삼릉(西三陵)을 돈 이날 점검에선 다행히 산짐승 피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산사태 발생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방협회 경기지부의 김윤진 사무국장은 “왕릉이 대부분 산 구릉 ‘명당’에 위치해 큰 위험은 없지만, 배수로 시설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은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가장 많은 논의가 오고간 대목은 정자각의 안정성 문제였다. 한자 ‘고무래 정’을 닮은 정자각은 왕릉에 세우는 제례용 건축물. 글자 생김새대로 앞쪽으로 배례청(拜禮廳)이 튀어나온 구조라 무게중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온릉은 물론이고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덕종(德宗)의 경릉(敬陵),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모셔진 순창원(順昌園)도 기둥이 기울거나 서까래가 휘었다. 김기주 한국기술교육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특히 조선 전기 건축물은 하중을 나눠주는 받침대가 부실한 면이 있어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 40기를 비롯해 원(園·세자나 세자빈,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 14기와 묘(墓·그 밖의 왕실 관련 인사의 무덤) 66기를 합치면 120기나 된다. 관리가 쉽지 않아 현재 43기만 일반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이번 점검을 계기로 나머지 왕릉도 차츰 개방할 방침이다.
김정남 조선왕릉관리소장은 “내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모셔진 영원(英園)을 시작으로 2019년까지 10기를 순차적으로 공개할 것”이라며 “소중한 문화재를 시민과 함께 가꾸고 지키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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