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공연장의 소리가 식당에서 사먹는 밥이라면 풍류방은 엄마가 해주신 ‘집밥’이죠. 풍류방 소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고 깊죠.” 9일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한옥마을 내 민씨 가옥. 천재현 서울남산국악당 예술감독이 술대(거문고를 연주할 때 쓰는 가느다란 막대기)로 거문고 줄을 세게 탈 때마다 고택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기자의 엉덩이로 그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거문고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장구와 북을 치자 상당한 강도의 떨림이 느껴졌다. 멀티플렉스 4D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소리도 깊었다. 일반 공연장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
비결이 무엇일까. 천 예술감독은 “120년 된 민씨 가옥 자체가 국악기의 울림통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들의 문화공간인 풍류방은 소리의 비결을 간직하고 있다. 주로 한옥의 사랑채 공간을 활용한 풍류방은 시와 그림, 국악을 즐기던 조선시대의 공연장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 서울과 전북 전주, 전남 해남 등에서 6곳만 상설 운영되고 있다.
풍류방의 풍성한 소리 비결에는 한옥의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1895년에 지어진 민씨 가옥(명성황후의 친척조카 민영휘의 집)은 땅바닥에서부터 소나무 재질의 대청마루 사이에 33cm 높이의 빈 공간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바닥에 놓고 연주하는 거문고, 가야금, 장구와 같은 악기의 울림통 역할을 한다. 문에 발린 창호지는 소리의 약 50%를 방안에 가두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보내며 소리의 들숨과 날숨을 조절한다.
조인숙 건축사는 이 공간의 건축과 소리의 관계에 대해 “악기의 음색이 나무에 부딪치며 반사되거나 창호지에 흡수되고, 불필요한 음은 나무 기둥과 기둥 사이로 날아간다”고 했다.
120년 된 고택의 재료인 나무와 흙도 좋은 소리에 큰 몫을 한다.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나무 재질의 국악기를 만들 때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10년가량 썩힌 나무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은 어떨까. 이 공간은 현대식 공연장에 풍류방을 재현한 130석 규모의 상설 공연장이다. 한옥 건물은 아니지만 한옥의 원리를 백분 활용해 국악기 본연의 소리를 잘 담아낸다는 평가다.
공연장 내부에 들어서면 천장에 대나무 재질의 서까래가 눈에 띄는데 이는 소리의 울림을 객석 뒤까지 골고루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서까래 상부에는 흡음재인 폴리에스테르를 부착해 지나친 울림을 동시에 막고 있다. 객석을 감싼 벽면은 국내산 황토를 발랐다. 황토가 숨을 쉬면서 소리를 흡수해 불필요한 잡음을 제어한다.
황토벽이 소리를 흡수하는 ‘들숨’ 역할을 한다면, 통로 상부 창틀 형태의 음향 반사판과 무대 위 천장에 매달린 아크릴 음향반사판, 나무로 만든 무대 뒤 반사판과 객석 뒤 음향 확산판은 ‘날숨’을 만들어 낸다. 이 장치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위치에서 사방으로 퍼질 수 있는 소리의 울림을 객석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공연장의 음향기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객석 어느 자리든 선명한 음색과 소리의 여운(잔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풍류방은 일부 국악인에게 ‘두려운’ 공간이다. 천 예술감독은 “일반 공연장에서는 음향기기를 통해 감추고 싶은 소리를 얼마든지 숨길 수 있지만 풍류당에서는 소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어 공연을 꺼리는 국악인도 있다”고 했다.
민씨 가옥에서는 14일∼6월 20일 ‘내일의 예인’ 독주 공연이 열린다.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는 15일 지순자 명인의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와 김일구 명인의 ‘김일구류 아쟁산조’, 21∼23일 안숙선 명창의 ‘토끼타령으로 삼일(三日) 놀다’가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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