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축에선 일본 노래만 흘러나온다. 어린이 교육상 좋지 못하겠기에, 잘 간직해 둔 아끼는 한국 판(아리랑 고개 넘어)을 꺼내서 들려줬다.…국산 LP판 음악 소리가 나오면 다들 좋아하신다. 있을 땐 몰랐으나 떠나 보니 무엇이나 ‘한국적’인 게 좋다. 2세들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1963년 1월 브라질로 가는 배에서)
큰맘 먹고 여객선에 몸을 실은 지 겨우 한 달 남짓. 벌써부터 고향 것은 모든 게 소중했다. 망망대해에 울려 퍼지던 아리랑은 대관절 뭐라서 이리도 맘을 울컥거리게 만들까. 51년 전, 대한민국의 ‘공식 이민 제1호’ 브라질 이민단은 그렇게 바다를 가르며 조국과 이별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브라질 수교 55주년을 맞아 개최한 특별전 ‘브라질 속의 한국인’에는 왠지 박물관엔 어색해 보이는 전시품이 하나 있다. 튤립 꽃문양이 앙증맞지만 너무도 낡디 낡은 스프링노트 한 권이다. 푸른색 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은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에서 출발한 이민자 103명에 끼어 있던 백옥빈 여사(91)가 쓴 일기. 평북 정주 출신인 그는 서울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가족 전체가 이민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삶은 여정부터 쉽지 않았다. 장장 56일 동안 홍콩과 싱가포르를 지나 인도양을 건넌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대서양을 횡단했다. 거친 풍랑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가슴 아픈 건 그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백 여사는 “한국이 싫으냐. 무엇하러 먼 데까지 가느냐며 비웃는 이들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한국 사람으로 한국을 싫어하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이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 헐뜯고 우물 안 개구리로 복작대는 것보다 넓은 땅에서 마음껏 배우고 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은 마음. 나아가 한국의 이름을 널리 떨치고, 제2의 한국을 브라질에 이룩할 수 있단 희망이 결심의 동기였습니다.’
어렵사리 도착한 이국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브라질 1인당 국민총소득은 230달러로 한국(110달러)의 2배. 그보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빌딩들이 즐비한’ 도시에 압도됐다. 백 여사는 ‘(여기가) 지상낙원도 아니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고락이 같이 있다는 걸 알았다’며 ‘다만 자기가 노력하면 그만큼 발전할 수 있기에 우리는 여기 왔다’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농장을 차리려던 이민자들의 꿈은 겨우 3∼4년 만에 풍비박산이 났다. 1965년까지 총 1300여 명이 농업이민을 왔지만 성공한 이가 없었다. 이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민자들은 대다수 퇴역장교거나 도시 중산층 출신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최금좌 한국외국어대 교수)이다. 농토 개간 인력을 바라는 브라질과 이민 자체가 목적이던 한국 정부의 동상이몽 사이에서 이민자들만 애꿎은 고생을 한 것. 결국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향했다. 백 여사 가족 역시 상파울루로 떠났다.
이후의 일은 일기에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의류사업에 뛰어들어 특유의 근면성실로 한인 의류상가 ‘봉헤치루(Bom Retiro)’를 현재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거리로 만들었다. 백 여사 가족은 전문직의 길을 택했다. 남편은 의사, 본인은 약사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염경화 학예연구관은 “일기를 보면 이민자들이 해마다 명절은 물론이고 3·1절 같은 국경일을 함께 보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며 “동포들이 똘똘 뭉쳐 고난을 극복한 역사는 감동 이상의 큰 울림이 있다”고 말했다. 6월 15일까지 무료. 02-370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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