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어쩌면 ‘장마철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휩쓸려가는 거대한 황톳물’ 같은 것 아닐까. 그 속의 개인은 하찮은 개미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떠내려가는 나무등걸에 붙어 대책 없이 구두덜대기나 한다.
그렇다. 선비는 끊임없이 불퉁거리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새 시대에 대한 ‘타는 목마름’, 이른바 ‘변(變)’이다. 그렇다고 옛것을 무조건 내치는 것도 아니다. 좋은 것은 계승한다. 바로 ‘통(通)’이다. 한마디로 ‘통변(通變)’은 옛것을 이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꿈꾼다.
저자는 격동의 한국 역사 240년(1714∼1954년) 동안 ‘웅변하고, 통곡하고, 환호하는’ 먹물의 아우성을 콕콕 끄집어냈다. 그 시대 글깨나 했다는 사람들의 고뇌를 오늘의 거울에 비춰 되새김질했다. 일단 거대담론이 아니라서 좋다. 술술 읽히고 가뿐하다. 수필 같은 소품 50꼭지를 가려 뽑았다.
1737년 가을, 안정복(1712∼1791)은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왔다가 벙어리저금통(啞器)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결연히 부숴버렸다. 왜 그랬을까. 영조의 ‘당론 금지령’에 대한 어깃장이었다. 탕평도 좋지만, 사대부가 말없는 벙어리저금통같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홍대용(1731∼1783)은 ‘중화와 오랑캐’라는 말에 딴죽을 건다. 그것은 “공자가 ‘춘추’에서 제시한 가치인데, 만약 공자가 조선에서 태어나 ‘춘추’를 지었다면 어찌되는가”라고 반문한다. 박제가(1750∼1805)도 ‘정작 중국은 만주몽골 세상인데, 왜 조선은 허상의 중국에 매달리느냐’며 일갈한다.
홍한주의 ‘서울장안의 가짜도인’, 이응신의 ‘군자소멸론’, 이상수의 ‘글을 지은 뒤에야, 글을 잘 읽을 수 있다는 독서론’, 김창희의 ‘서북인 차별에 대한 소고’….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근대의 싹이 트는 조선 후기. 세상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전후의 풍경도 빠질 수 없다. 안효제의 ‘단발령 일기’, 장지연의 ‘우산국·울릉도·폴란드·청나라의 공통점’, 김로수의 ‘한글전용론 비판’, 김석익의 ‘제주에서 보는 한국사’…. 시대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몸부림에 가슴이 젖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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