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베이커가 221B에 사는 이 남자는 공갈빵 모자에 깃 세운 코트를 즐겨입는다. 그는 작은 단서로 놀라운 추리를 해내는 천재지만 무척 까칠하다. 낮은 목소리에 빠른 속도로 말한 뒤엔 상대에게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 지루한 표정을 지어주는 걸 잊지 않는다.
코넌 도일의 소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BBC 드라마 ‘셜록’ 시리즈는 180개 나라에 팔리며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영국 드라마 작가 스티븐 모팻(53)은 ‘셜록’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스를 21세기로 불러들인 셜록의 ‘새아버지’다.
모팻이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첫 한국 방문길에는 아내이자 ‘셜록’ 시리즈의 제작자인 수 버추(54)가 함께했다. 셜록처럼 날카롭고 예민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22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알림관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였다. 그는 “천재에 대한 이야길 쓴다고 천재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라며 껄껄 웃었다. “셜록처럼 누군가를 한 번 보고 뭘 알아맞힌 적이 없다. 그건 노력해도 안 된다.”
드라마 ‘셜록’에는 에피소드 제목부터 원작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 ‘분홍색 연구’는 도일의 소설 ‘주홍색 연구’에서, ‘세 사람의 서명’은 ‘네 사람의 서명’, ‘마지막 서약(vow)’은 ‘마지막 인사(bow)’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21세기로 온 인물들은 일기 대신 블로그를 쓰고 셜록은 마차 대신 스쿠터를 애용한다.
어린 시절부터 셜록 홈스의 광팬이었다는 모팻은 “19세기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이 21세기에 다시 일어나는 것을 포함해 원작의 배경이 현 시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다”며 “도일의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에 쓰여졌지만 시대적 특징이 강하지 않아 현대화하기에 수월했다”고 말했다.
“소설 셜록 홈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캐릭터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컴버배치가 한 얘긴데 셜록의 지적수준은 초인간적인데도 달성 가능해 보이는 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셜록’을 맡은 베니딕트 컴버배치는 드라마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첫 시즌 촬영 때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젠 촬영을 할 때면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다고. 모팻은 “컴버배치가 없었다면 지금의 셜록은 없었을 것”이라며 “작품 초기에는 작가가 배우에게 캐릭터에 대해 설명해주지만 나중에는 배우가 작가에게 캐릭터를 설명해준다”고 했다.
모팻은 또 “셜록은 ‘사건’보다 ‘모험’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반 수사 드라마와 다르다”며 “영국적인 특징을 갖춘 것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비결 같다”고 말했다.
“훌륭한 드라마를 보면 결국 그 나라다운 걸 하고 있는 게 많다. 미국드라마라면 미국적인, 한국드라마라면 한국적인 문화가 담겨 있는 게 좋다. 최근 미드 ‘24’의 배경이 런던이던데 별로였다.”
팬들은 셜록과 동료인 존 왓슨(마틴 프리먼)의 우정에서 ‘브로맨스(brother+romance)’ 코드를 읽어내기도 한다. “동성애적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셜록과 존의 우정은 하룻밤을 보내는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 전 생에 걸쳐 진행되는 사랑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킬 앤드 하이드’ ‘셜록 홈스’ 등을 각색해 여동생에게 연기를 시켰다는 그는 1989년 어린이 드라마 ‘프레스 갱’을 통해 작가로 데뷔했다. 영국에서 ‘국민 드라마’로 불리는 SF ‘닥터후’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날 방송작가협회와 SBS문화재단이 주관한 행사에서 국내 작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성공하는 글쓰기’ 강연도 했다.
“난 운이 좋았을 뿐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하면 오만한 거다. 다만 성공을 위해 쓰기보단 스스로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단어 하나를 쓸 때마다 신나서 쓸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