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이미지를 못 읽으면 미래의 문맹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31일 03시 00분


◇이미지 인문학 1/진중권 지음/336쪽·1만7000원·천년의상상
디지털 呪術, 축복인가 저주인가

가상과 현실을 뒤섞는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들. 안성석의 ‘Two-phase’(2012년·왼쪽 사진)는 조선총독부가 찍은 남대문의 흑백사진을 투사한 이동식 스크린과 현실의 남대문을 병치시켜 과거와 현재, 타자와 우리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한성필의 ‘마그리트의 빛’(2009년)은 보강공사 중인 벨기에 브뤼셀 마그리트 박물관의 방진막으로 설치됐다. 열린 커튼 사이로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입체화시키고 진짜 조명과 가짜 조명을 활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천년의상상 제공
가상과 현실을 뒤섞는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들. 안성석의 ‘Two-phase’(2012년·왼쪽 사진)는 조선총독부가 찍은 남대문의 흑백사진을 투사한 이동식 스크린과 현실의 남대문을 병치시켜 과거와 현재, 타자와 우리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한성필의 ‘마그리트의 빛’(2009년)은 보강공사 중인 벨기에 브뤼셀 마그리트 박물관의 방진막으로 설치됐다. 열린 커튼 사이로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입체화시키고 진짜 조명과 가짜 조명을 활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천년의상상 제공
중국에는 그림(이미지)에 얽힌 3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있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신선의 이야기, 벽화 속 용의 눈을 그려 넣었더니 용이 살아나 승천했다는 이야기, 벽화 속 폭포의 물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다면서 폭포를 지워버릴 것을 명한 왕의 이야기다.

미학에 관한 탁월한 이야기꾼 진중권은 얼핏 닮아 보이는 이 세 가지 전설적 마술이 현실에서 이미 실현됐다고 말한다. 어떻게?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다. 첫 번째는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가 가상의 세계에 입장하도록 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두 번째는 영상인식과 위치추적 기술을 통해 가상의 좌표를 현실 좌표에 틈입시켜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키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다. 마지막은 스스로 증식하고 진화하도록 프로그램 된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이런 ‘이미지 혁명’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저자는 체코 출신의 매체철학자 빌렘 플루서(1920∼1991)의 논문 ‘디지털 가상’을 토대로 이를 풀어간다. 플루서는 인류역사를 다섯 단계의 매체 코드가 지배해왔다고 설명한다. 4차원적 춤(동작), 3차원적 조각(입체), 2차원적 그림(면), 1차원적 문자(선), 0차원적 비트(점)이다.

진중권은 이를 선사시대의 매체로서 그림, 역사시대의 매체로서 문자, 탈역사시대의 매체로서 비트로 압축한다. 비트의 시대는 영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로이 애스콧(80)의 말을 빌리면 ‘후기생물학적 빅뱅의 시대’다. 여기서 빅뱅은 대폭발이란 뜻과 함께 비트(Bit), 원자(Atom), 뉴런(Neuron), 유전자(Gene)의 머리말을 딴 뱅(B.A.N.G.)의 시대임을 말한다. 이들 현대 과학기술 단위는 연속적 선형체가 아니라 점에 가까운 입자라는 점에서 서로 공명을 일으킨다.

이런 비트의 시대는 곧 디지털 이미지의 시대이기도 하다. 진중권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선사→역사→탈역사’의 선형적 발전이 매체 미학적으론 ‘이미지→문자→이미지’의 순환발전을 이룬다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은 역사 이전의 현상이었다. … 가상의 원인이 현실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바로 주술의 힘이기 때문이다. 역사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졌던 이 선사의 상징형식이 디지털 기술형식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 선사인의 상상이 그저 공상에 그쳤다면 우리의 상상은 기술에 힘입어 현실이 된다. 이것이 역사 이전의 마술과는 구별되는 역사 이후의 ‘기술적 마술’이다.”

이런 인식은 선형적인 문자문화의 산물로서 근대 미학에 대한 비판의식과 결부돼 탈근대적 디지털 찬가로 이어진다.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문자문화에서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영상문화로의 전환은 암울한 ‘저주’가 아니라 원시인들이 꿈꾸던 총체적 삶을 구현시켜 주는 ‘축복’이란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중시한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의 창조 자체에서 희열을 느꼈던 고대의 존재론적 미학으로의 복귀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모더니즘의 몽타주 미학이 가상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진리의지’를 드러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디지털 이미지는 진리가 사라진 시대의 허무에 창조의 기쁨으로 대항하는 ‘가상의지’를 대변한다.”

이런 논리는 영상문화가 ‘읽기’와 ‘심사숙고’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인문학계의 우려가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함축한다. ‘이미지 인문학’이란 제목 자체에 문자 중심의 인문학에서 벗어나 이미지 중심의 인문학으로 전향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미래지향적이고 매력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이 책엔 이런 ‘이미지 인문학’의 맹점을 노출하는 불길한 자기암시로 가득하다. 디지털 문화의 주된 미학적 정조로서 ‘섬뜩함(the uncanny)’,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를 빚어내는 디지털 문법으로서 파타피직스(pataphysics), 개별적 존재가 찔러오는 고유한 미학적 효과인 푼크툼(punctum)의 상실…. 저자가 말하는 디지털 미학의 모토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도 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영상매체가 아닌 활자매체에 의존해 ‘이미지 인문학’을 펼치는 저자 자신의 ‘자기부정의 역설’부터 답해야 하지 않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미지 인문학#디지털 기술#진중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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