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재 경인미술관장, 제조 420주년 맞아 ‘속설과 실체’ 규명
전통도검과 달리 살짝 휘었지만 고려때도 曲刀 존재
임란때 日양식 일부 수용 길고 강하게 개량
칼자루-칼집-문양 형태 모두 조선식
197cm 4.3kg… 실전아닌 의장용
《 “충무공의 장검은 조선 환도를 기본으로 외래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결합돼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칼이다.”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장검 2자루는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칼이다. 조선 도검 자체가 드물게 남은 데다 왜란의 풍파에서 조국을 수호했다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민족의 가슴에 자긍심으로 자리 잡았다. 실물은 아니지만, 서울 광화문에 선 장군 동상의 허리춤을 줄곧 지켜와 대중에게 익숙하다. 》
올해는 1594년 장검이 제작된 지 7주갑(周甲), 420주년을 맞는 해. 하지만 국민적 사랑을 받는 보물임에도 실체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세간에 여러 설이 난무하며 오해받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최근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가 펴낸 전시도록 ‘겨레를 살린 두 자루 칼, 충무공 장검(8월 31일까지)’에 실린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의 ‘이 충무공 장검 분석―성웅의 칼, 그 속설과 실체’를 보면 그간의 궁금증을 상당히 풀 수 있다.
먼저 충무공 장검이 일본도란 시각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일본도 양식을 일부 받아들였을 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200년이 넘는 평화 시기를 보냈다. 이 때문에 오랜 전란을 겪은 일본처럼 도검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짧고 가는 칼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맞붙자 우수한 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길고 강한 일본도의 칼날을 수용한 것이다.
이 관장은 “왜군이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해 조선도 조총을 생산해 맞선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당시 의병장 곽재우(1552∼1617)와 권응수(1546∼1608)의 장검도 일본도의 칼날을 본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검이 우리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다른 양식은 대부분 조선식이기 때문이다. 칼자루와 칼집 형태, 장식이나 입사문양, 가죽 끈도 모두 한반도에서 자생했거나 오래전 중국에서 건너와 토착화한 방식이다. 흔히 장검 자체가 휜 것을 두고 “전통 도검은 직선적 형태뿐”이라 주장하는데, 고려 기록에 이미 곡도(曲刀)가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충무공 동상의 장검도 풀 오해가 있다. 한때 일본도를 차고 있다는 논란이 컸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관장은 “일본 전문가들도 자국의 가타나(刀)와 관련 없다고 확언했다”고 말했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를 흉내 낸 조선식이 맞다. 다만 원본과 비례도 맞지 않고 장식 크기나 간격도 왜곡됐다. 고증이 부족한 ‘졸작’인 건 분명하지만, 일본도는 아니다.
충무공의 장검은 2자루가 각각 197.2cm와 196.8cm(무게 약 4.3kg)에 이른다. 그래서 자신의 키보다 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이 관장은 “이 칼들은 실전이 아닌 의장용”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칼날에 격검흔(擊劍痕·검이 부딪친 흔적)이 없다. 게다가 조선후기 문신 박종경(1765∼1817)이 지은 ‘원융검기(元戎劒記)’에 “공이 실제 사용한 검은 쌍룡검(雙龍劒)”이란 문구가 나온다. 쌍룡검은 양날을 쓰는 검으로 길이가 90∼100cm로 추정된다.
의전 목적이었다고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과학적 분석 결과 충무공 장검은 열처리 흔적이 확인됐으며, 오랜 세월에도 부식이 현저히 낮다. 잡 성분이 섞이지 않은 양질의 쇠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담금질했단 뜻이다. 이 관장은 “충무공 장검은 조선의 수준 높은 제철 기술과 공예 문화를 바탕으로 적의 무기 양식마저 우리 것으로 받아들인 특급 명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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