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희 교수 연구서에서 밝혀
18∼19세기 경제적 발전에 힘입어 새로 부상한 中人계층 新문화 형성
기득권층과 차별화된 양상 드러내
日세속화 ‘우키요에’도 동시대 유행… 사무라이 문화와 다른 유흥소재 다뤄
상업성 철저… 순수 조선 그림과 차이
《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제135호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筆風俗圖畵帖·일명 혜원전신첩)’의 30여 그림 가운데는 ‘쌍검대무(雙劍對舞)’란 작품이 있다. 7명으로 구성된 악공의 연주에 맞춰, 화려한 복장을 한 무희 2명이 멋들어지게 칼춤을 춘다. 그리고 왼쪽 위엔 한눈에도 돈푼깨나 있음 직한 무리가 느긋하게 이를 감상한다. 혜원 신윤복(1758∼?)이 그린 이 그림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지만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살짝 의문이 든다. 담박한 유교문화를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이 ‘흥청망청한’ 그림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기생을 끼고 앉아 유희를 즐기는 모양새가 그리 교훈적이지도 않건만. 》
풍속화 연구가인 이중희 계명대 미술대 교수(64)는 최근 펴낸 연구서 ‘풍속화란 무엇인가’(눈빛)에서 이를 “동북아시아 봉건사회 해체기에 등장하는 주류사회에 대항하는 여항문화(閭巷文化·중인 계층 중심의 문화)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18, 19세기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계층이 기존 지배계급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풍속화를 비롯한 판소리, 방각본소설(坊刻本小說·조선 후기 상업문학)이란 설명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쌍검대무를 보면 색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연회를 즐기는 집단이 사대부라면, 이 작품은 앞에선 청빈탈속을 외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양반네의 이중적 태도를 비꼬는 속내가 담겼다. 반면 돈 많은 중인 계층이라면, 기존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를 향유하는 ‘부르주아의 생활’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복장만으로 구별하긴 애매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기득권과 차별화된 문화적 양상이다.
이 교수는 특히 풍속화가 만개한 시점에 주목했다. 한국 회화사에서 ‘풍속화 시대’는 김홍도(1745∼1806?), 신윤복, 김득신(1754∼1822)이 활약한 시대를 일컫는다. 영조, 정조, 순조가 재위했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해당한다. 이 교수는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던 산수화나 인물화 중심 화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는 풍속화의 등장은 봉건시대의 논리가 한계에 봉착하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만의 상황도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인 17∼19세기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가 유행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사실 일본에서 세속화는 이미 10세기부터 출현했으나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를 중심으로 꽃핀 화려한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는 18세기 후반부터 번성했다. 역시 상위 계층인 사무라이 문화의 엄격함과는 동떨어진 유흥과 생활밀착형 소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조선 풍속화와 일본 우키요에는 지향점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풍속화는 당대에 문인화보다 저평가를 받긴 했어도 비영리적 ‘순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키요에는 주로 유명 유곽이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목적을 지닌 철저히 상업적 작품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토록 ‘돈냄새 풍기는’ 그림들이 19, 20세기 ‘자포니즘(Japonism·일본풍)’의 첨병이 돼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단 점이다. 이 교수는 “양국 풍속화에는 경제 활황 속에서 자라난 시대적 비판의식과 비지배 계급도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단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풍속화는 동북아에서 새로이 솟아오르는 ‘근대의 여명’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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