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주 한택식물원장(73)은 멋쟁이 노신사다.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178cm 69kg)가 영락없이 참나리꽃을 닮았다. 중절모를 쓰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마치 패랭이꽃이 바람에 살짝살짝 나풀거리는 것 같다. 걸음걸이가 꼿꼿하다. 마침 용인 한택식물원에선 나리꽃이 하나둘 피어나고, 패랭이꽃이 우우우 한창이다. 이미 푸르스름한 산수국꽃은 지천이다. 머지않아 붉은 연꽃이 파하! 파하! 벙글 것이다.
이 원장은 거의 식물원 밖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노년에 남들은 외롭다는 데 그에겐 그럴 틈이 없다. 자고나면 한 뼘씩 자라는 잡초 뽑기에도 바쁘다. 요즘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할 판이다. 싱글 수준의 골프도 15년 전부터 딱 끊어버렸다. 회원권과 골프채는 진즉 사위에게 줬다. 사위는 회원권을 팔아 그 돈을 식물원운영비로 쓰라며 가져왔다. 내심 기특했다.
술은 아예 입에 대지도 못한다. 담배는 하루 한 갑반이나 태우지만, 그것도 식물이 없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피운다. 숙소는 물론 식물원부근 지척이다. 밤 9시 반쯤이면 어김없이 잠이 들고, 아침 5시쯤 칼같이 일어난다. 우선 새벽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식물원을 한바퀴 둘러본다. 새들이 재잘재잘 반긴다. 부지런한 벌 나비들은 벌써 꿀을 빠느라 꽃술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호주온실의 세 그루 바오바브나무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그렇다. 용인 비봉산 기슭 한택식물원(66만 m²·약 20여만 평)은 그의 천국이다. 35년 전인 1979년, 서른여덟부터 겁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일군 그의 ‘피땀 어린 삶의 현장’이다. 그의 얼굴은 들꽃처럼 정갈하고 맑다. 곱게 늙은 절집 같다.
“난 원래 서울공고와 한양대에서 토목을 전공한 사람이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회사에 들어가 도시설계를 했다. 한 10년 가까이 여관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죽어라 일만 했다. 꽃이 피는지 단풍이 물드는지 전혀 무관심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활이 지겨워졌다. 그때부터 돈이 생기면 고향인 용인 비봉산자락의 땅을 사두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꿈꿨던 것이다. 마침내 1973년 이곳에서 목장을 시작했다. 헌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한우 한 마리 150만 원 주고 사다가 3년 길렀더니 90만 원이 돼버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소는 장조카에게 줘버리고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그것도 심는 족족 말라비틀어져 죽었다. 전문가들에게 물어서 그대로 했더니 더 잘 죽었다. 분통이 터졌다. 1977년인가 아예 내가 배낭을 메고 유럽 30여 개국을 돌아보며 그네들은 어떻게 하나 살펴봤다. 자연히 각국의 내로라하는 식물원에 가야만 했다. 가보니 내가 얼마나 엉터리로 나무를 심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돌아와서 알아보니 유엔가입 국가 중 식물원이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당시 북한에도 2개나 있었는데…. 그때 난 결심했다. 내가 식물원을 세우기로.”
식물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외국식물은 살 수가 있는데, 우리 자생식물은 돈을 줘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데도 파는 곳이 없었다. 이 원장이 직접 채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유달영 선생(1911∼2004)과 이창복 선생(1919∼2003), 이영노 선생(1920∼2008)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느 식물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쳐줬고, 채집여행도 같이 다녔다. 이영노 선생과는 신종발견을 10개 이상 함께 했을 정도였다. 동강할미꽃, 태백기린초, 둥근잎정향나무, 별꽃, 울릉도고추냉이, 설악산권금성 솜다리 등. 하지만 동강할미꽃 하나만 이택주 원장과 공동 발표했다. 나머지는 이영노의 단독이름으로 세상에 공표됐다. 이 원장은 그런데 욕심이 없었다. 그는 식물 가꾸는 사람이지 식물학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청송주왕산 절벽 바위틈에서 ‘둥근잎꿩의비름’을 발견했다. 너무 험해서 일행 중 아무도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뜸 내가 나섰다. 가까스로 올라가 씨앗을 따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아뿔싸!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몸이 거꾸로 떨어지는데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천만다행으로 두 번인가 나뭇가지에 걸려 등허리에 생채기 나는 정도로 끝났다.”
한국은 ‘종자빈국’이다. 국제경쟁력이 한참 약하다. 자생식물이라고 해봐야 3500여 종에 불과하다. 변이종을 모두 합쳐도 기껏 4900여 종이다. 이 중 쓸만한 것은 1000여 종이나 될까. 이웃 일본은 우리보다 3배쯤 많다. 전 세계 식물이 25만 종쯤 되는데, 남아공은 희망봉에서 나는 식물만 8000여 종이다. 그것도 거의 약초나 향신료로 가치가 높다. 영국은 자기네 나라에서 나는 것은 1800여 종에 불과하지만, 보유종은 4만5000여 종이나 된다. 독일 5만여 종, 미국은 6만 종에 이른다. 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도 엄청나다. 그런데 한국은 2002년 덜컥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에 가입했다. 이른바 한국의 식물주권을 주장한 것이다.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건 식물자원이 많은 나라가 주장하는 것 아닌가. 누가 봐도 우리 같은 ‘씨앗빈국’은 식물주권에 반대해야 국익에 맞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그저 산에 나무만 많이 심으면 좋은 줄 안다. 자연초지가 다 사라졌다. 풀밭은 희귀식물의 보금자리다. 대관령부터 태백산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고원초원이 얼마나 많았는가. 풀이 많으면 토양부식이 잘돼 옥토가 된다. 유럽 미국은 토양부식률이 무려 65%다. 삽만 대면 푹푹 들어간다. 우리는 5%나 될까. 태백산 금대봉은 우리나라 최고의 자생식물 군락지였다. 6월엔 개불알꽃이 지천이어서 그걸 밟지 않으면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곳에 산림청이 낙엽송을 심는 바람에 망쳐버렸다. 뒤늦게 지금 산림청 차장인 김용하 씨가 그 지역 책임자로 있을 때 일부를 베어냈지만 너무 늦었다. 낙엽이 많이 쌓이면 빗물이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곰팡이균이 생겨 토양균을 죽여 버린다. 멧돼지가 왜 서울도심에 나타날까. 풀뿌리가 사라져 먹을 게 없으니 그런 것이다. 나무와 풀이 같이 살아야 숲이 건강한 것인데 우리는 너무 나무만 떠받든다.”
지구촌은 바야흐로 ‘씨앗전쟁’을 벌이고 있다. 병 고치는 약도 70%가 식물에서 나온다. 식물원은 그 종자를 보존하고 연구, 교육하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자생식물은 살아있는 생명문화재다. 이 원장은 사람들이 야생화를 관상용으로만 예쁘게 보는 것에 절대 반대다. 잘 활용해서 농민 소득증대의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국토의 70%가 산인데, 산을 너무 놀리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한 게 인삼재배인데, 그 인삼도 이젠 산의 품에서 길러야 한다. 농약치고 기르면 그걸 누가 사먹겠나. 참취, 곰취, 산마늘 등 산에서 자란 산채들은 하우스에서 키운 것과는 맛이나 영양에서 비교가 안 된다. 어느 산이든 식물은 축축한 동북사면에서 잘 자란다. 자생식물을 원예종으로 바꿔 시장에서 돈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네덜란드가 바로 좋은 예다. 요즘엔 잡목이 무성해 산나물도 많지 않다. 그걸 산림청에서 간벌하고, 잡목뿌리나 칡덩굴까지 걷어내서 농민들이 뭔가 키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봄여름에는 꽃가루가 떨어지고, 가을엔 낙엽이 진다. 그게 다 유기물이다. 미생물은 바로 그 유기물을 먹으며,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식물은 그 흙에서 싹이 트고 자라며, 산소도 만든다. 동물은 식물을 먹고, 식물이 만든 산소로 숨을 쉰다. 그러니 식물사랑이 동물사랑이고 국토사랑이요 나라사랑이다.” ▼ ‘대단한 일 한다’는 말에… 때려치울 수가 없더라 ▼
1만여종 식물천지, 한택식물원 오늘에 이르기까지 1985년 이택주 나이 마흔넷, 식물원은 ‘밑 빠진 독’이었다. 할일은 끝이 없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동네사람들은 ‘무슨 돈도 안 되는 잡풀을 키우냐’며 미친놈 취급했다. 친구들도 ‘싱거운 짓 그만하라’며 비웃었다. 도와주기는커녕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스르르 힘이 빠졌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때려치우자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한편으론 너무 억울하기도 했다. 그동안 쏟았던 땀과 정성이 아까웠다. 아내(이순영·74)도 ‘여태까지 해오던 것을 왜 그만두느냐’며 은근히 핀잔을 줬다. 그때까지 남편이 무슨 일을 해도 묵묵히 참고 도와주던 착한 아내였다.
“살다보면 운명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1980년 일본이 CITES(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면서부터 일본국내에서 야생화 붐이 크게 일었는데, 그게 1980년대 중반이후 한국으로도 번졌다(한국 1993년 가입). 하지만 야생화에 대해 알아볼 곳은 우리 식물원밖에 없었다. 자연히 신문과 방송이 몰려와 촬영하고, 관련학자들의 발길이 잇따랐다. 단연 화제의 인물은 나였다. 저마다 ‘대단한 일을 했다’며 칭찬했다. 난 우쭐했다. 내가 진짜 잘난 줄 알았다. 결국 그 바람에 호랑이 등을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ㅎㅎㅎ”
외국의 식물원은 대부분 국가나 대기업이 운영한다. 미국의 롱우드가든(1906년 설립·식물 1만1000여 종) 같은 경우 세계적인 사업가 피어 듀폰(화학회사 듀폰 창립자)이 인수해 키운 곳이다. 그만큼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든다. 하지만 한택식물원은 이 원장 혼자서 발이 닳도록 국내외를 떠돌며 종자를 수집하고 키웠다. 초창기엔 외국 유명식물원에 찾아가면 만나주지도 않았다. 서러웠다. 그래도 만나줄 때까지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중국 베이징식물원도 그런 경우였다. 1990년대 초 칭화대 기숙사에서 사흘 동안이나 머물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상호교류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북한식물 상당수를 그곳의 도움을 받아 얻어왔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식물 이름만 알면 전부 안다고 생각한다. 식물분류학 공부가 가장 대접을 받는다. 가서 휭∼하니 사진만 찍고 온다. 사실 식물을 어떻게 키우는 것을 아는 게 진짜 공부인데…. 그 정도라면 우리 식물원을 찾는 유럽관광객만도 못하다. 그들은 학명 속명(屬名)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1993년 독일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 부인이 우리 한택식물원에 와서 무려 3시간을 둘러보고 갔다. 원래 1시간 예정이었는데 우리자생식물에 흠뻑 빠졌다. 그런데 그때 분재원에 모시고 갔더니 ‘그건 식물 학대이니 안 보겠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그분들은 식물사랑이 대단하다. 식물은 속명을 알아야 키우는 법을 알 수 있다. 서로 자라는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가령 모란, 작약은 같은 피어니(peony)속이라 둘 다 그늘을 좋아한다. 비비추나 옥잠화도 호스타(hosta)계열이라 축축한 곳에서 잘 자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양지바른 데 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죽을 수밖에. 나는 씨앗을 받아, 그와 비슷한 환경에 맞춰 심어주고 싹을 틔워낸다. 때론 널리 보급하기도 한다. 깽깽이풀이 그렇다. 원래 법정보호식물이었지만, 내가 경기도 광릉계곡에서 찾아내 번식해서 널리 퍼뜨렸다. 이젠 보호식물에서도 해제됐다. 뿌듯하다. 우리 식물원에 좋은 종자가 들어오면 2년쯤 뒤엔 시중에 나온다. 바로 그런 것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게 식물원이다. 한국은 씨앗의 상당부분을 외국에서 들여온다. 채소씨앗은 거의 다 사온다. 농업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한택식물원은 국내외 1만여 종의 식물을 확보하고 있다. 요즘도 해마다 100여 종 이상 들여온다. 그만큼 돈이 든다. 여태껏 수백억 원이 들어갔다. 그동안 자식같이 키웠던 식물도 팔고, 주변의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팔 것도 없다. 탐방객이 25만 명(지난해 15만 명) 정도만 넘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올핸 세월호 참사까지 겹쳐 탐방예정이던 학생 3만 명(지난해 8만 명)이 한순간에 취소했다. 탐방객도 덩달아 30%쯤 줄었다. 겨울엔 탐방객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 한해 200만 명 가까이 찾는 호주 시드니나 멜버른의 로열보태닉가든이 부럽기만 하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수익을 내는 줄 안다. 어떤 이는 ‘참 좋은 사업 한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소리다. 식물 키우는 게 어떻게 사업이 되는가. 내속 터지는 줄 모르고 그런 말하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겠다. 일일이 대꾸할 수도 없으니 혼자 그러려니 한다. 어쨌거나 이젠 잘나가던 내 친구들도 거의 은퇴했다. 그래도 난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다. 난 이 세상에 뭔가 하나는 남기고 가지 않는가. 그래서 참 좋다. 그때 그만두지 않은 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서울공고 동창생들이 2000만 원을 모아 식물원 안에 내 공덕비를 세워줬다. 처음엔 기겁을 하며 싫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욕은 먹지 않고 살았구나’라는 감동에 고맙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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