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담화 검증은 소탐대실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2일 19시 23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검증팀장인 다다키 게이이치 전 검찰총장이 결과 보고서를 들어 보이며 한일 양국 정부 간 문안 
조정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검증팀장인 다다키 게이이치 전 검찰총장이 결과 보고서를 들어 보이며 한일 양국 정부 간 문안 조정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일본이 결국 고노 담화를 '검증했다'. 그리고 20일 공표했다. 한일간에 삐걱대는 일이 한 둘이 아니고, 사안에 따라서는 일본의 주장이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일은 얄팍한 이득을 위해 대의를 저버린 처사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고노 담화는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1년 8개월 간 조사해 군 위안부의 모집과 이송, 관리에 군이 직, 간접적으로 간여했고, 군 위안부의 모집 과정에도 강제성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담화에서 피해자에게 사과까지 했다.
일본은 그동안 군 위안부 문제로 비난받을 때마다 고노 담화를 훌륭한 방패막이로 이용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담화를 발표하는 과정에 한일간 밀실 담합과 정치적 타협이 있었던 것처럼 발표함으로써 담화의 신뢰성과 진정성을 의심케 만들었다. 이런 일은 하라고 해도 안하는 게 보통인데, 일본 스스로 만든 담화에 일본 스스로 먹칠을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그동안 일본의 일부 정치인과 우익들은 고노 담화가 잘못됐다거나, 철회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해 왔다. 아베 신조 현 총리도 동조자 중 한명이다. 이번 검증은 그런 요구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그러면서도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고노 담화를 훼손해 놓고도 수정은 않겠다는 것은 일견 모순 같지만 이유는 분명하다. 대외적으로는 고노 담화의 효용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대내적으로는 불만 세력을 잠재우려는 시도다. 일거양득을 노린 꼼수다. 예전에 걸어 놓은 사과문에 진한 먹칠을 함으로써 읽을 수 없도록 해 놓고도 사과문은 그대로 걸려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를 찾아내 고노 담화를 이끌어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본질을 꿰뚫고 있다. "담화를 수정하고 싶지만 외교적으로 안 되니 신뢰성을 훼손한 것이다."

대외적인 노림수는 이미 성공을 거둔 듯하다. 미국은 "고노담화를 지지한다고 밝힌 일본 관방장관의 성명에 주목한다"는 코멘트를 내놓았다. 미국이라고 일본의 꼼수를 모를 리 없지만, 문제를 키우지 않기 위해 애써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말에만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직접 당사자인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 양두구육,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일은 납득할 수 없다. 일본말에 '고도모 다마시(어린애 속이기)'라는 게 있는 데 완전히 그 격이다. '고도모 다마시'는 어른이 어린애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긴 하지만, 옳은 일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은 어린애가 아니다. 이번 일은 속이기도 쉽지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일본은 이번 일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의 반발은 부분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에 옳은 것을 버리고 그른 것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줬다. 큰 것은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일본의 그릇도 드러났다.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도 증명됐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픈 사실은 남들은 다 아는 일을 일본만 모른다(모른 체한다)는 것이다.

검증이란 이름의 이번 시도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21년 전 같은 일본 정부가 1년 8개월이나 조사해서 내린 결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검증 결과가 나온 뒤, 어느 강연에서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인정한 이상, 그 외는 불규칙한 발언"이라고 못 박았다. '불규칙'이라는 말은 '쓸데없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 "군 시설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많은 여성이 (위안소에)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여러 가지 모집 형태가 있었겠지만 시설(위안소)에 들어가면 군의 명령으로 일했고,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위안부모집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과연 누구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아사히신문은 이번 검증 보고서가 역설적으로 일본 내 극우 세력이 주장해 왔던 2가지 논리를 뒤엎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일본 극우 세력들은 고노 담화에 대해 '강제 연행이 없었는데도, 한일이 정치타협으로 담화를 만들었다', '고노 담화의 근거로 제시된 위안부 16명의 증언은 신뢰성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 검증 보고서는 '일본 측은 사실관계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과 조율했다'고 밝혔으므로 고노 담화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는 게 아사히의 지적이다.

검증 보고서는 또 위안부 16명을 조사한 경위에 대해 '한국 정부에 일본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위안부 구술 조사를 실시했다'고 했다. 위안부의 구술 내용을 의심하는 대목은 없다. 그동안 극우 세력들은 '16명의 한국 위안부의 이름, 생년월일 등이 부정확해서 역사적 자료로 통용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지만, 보고서는 이런 주장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아사히가 주목한 두 번째 포인트가 이 대목이다.

어쨌거나 아베 정권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함으로써 한일 관계에 악재를 더했다. 아베 총리는 국회에서 검증을 요구한 이상, 정부는 이에 따를 의무가 있다고 대답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신뢰하고 계승할 의지가 확실했다면, 그런 요구쯤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노 담화를 발표한 것도 일본 정부이고, 현재의 정부가 이를 계승할 의사가 분명한 이상, 대외적으로 오해와 비난을 초래할 일은 국익에 도움이 도지 않으므로 검증은 하지 않는 게 타당하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도 고노 담화를 수정하거나, 철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리로서 공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검증'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고노 담화를 수정하거나 철회하자는 움직임이 아베가 처음으로 총리가 됐던 2006, 2007년경에도 힘을 얻고 있었던 것도 아베 총리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번 일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아베 총리가 지는 게 맞다. 그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심규선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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