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신들도 부러워한다는 한국은행을 박차고 나와 대만 유학길을 떠났다. ‘즐거운 고생’을 실컷 하고 돌아와 보니, 국내 경제 상황은 88올림픽의 대성공을 발판으로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증권 투자로 큰돈을 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학으로 빈털터리가 된 신세가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 학계의 원로 스승님들을 찾아뵈면 그런 세파에 초연해질 수 있어 좋았다. ‘스승 복’이 유난히 많은 나는 은사인 중당 정범진 교수님(후에 성균관대 총장 지냄)과 함께 연민 이가원 선생님 댁인 매화노옥(梅花老屋)에 자주 찾아가곤 했다. 연민 선생님은 내가 태어난 해인 1955년 성균관대 중문학과를 열었고, 연세대 국문과에 오랫동안 재직하다 퇴직해 당시 단국대 석좌교수로 계시던 한문학계의 태두이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내 고향 산 이름을 딴 ‘황학산방(黃鶴山房)’ 등 여러 편의 작품을 써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하루는 신문을 펼치며 “요즘은 눈을 닦고 봐도 한자는 하나도 없네 그려! 한글전용은 한자를 알아야 유리한데, 안 그런가!”라며 푸념조로 말씀했다. 중국의 문자학(한자학)을 전공한 내게는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가 훌쩍 지난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다짜고짜 “아빠! 등호(等號)가 뭐야?” 하고 물었다. 연년생으로 한 학년 위였던 아들도 질문 공세에 가담하여 ‘예각’ ‘둔각’ ‘타원’ ‘형광등’ ‘용수철’ ‘파충류’ 등 묻는 단어가 끊임없이 늘어났다. 그럴 땐 국어사전이 최고라며 함께 사전을 펼쳐 본 순간 아연실색했다. 아 글쎄! ‘파충류(爬蟲類): 파충강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니! 이해는커녕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격이었다.
그 순간 “한자를 알아야 유리하다”는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다. 한자를 몰라도 한자 지식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자. 그래서 “파충류는 기어 다닐 파(爬), 벌레 충(蟲), 무리 류(類)로, 뱀 같이 기어 다니는 동물 들을 이르는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더니 아이들은 속이 시원한 듯 좋아했다.
모든 한자어를 이런 식으로 풀이해 놓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새 사전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만난(萬難)을 극복하느라 10여 년을 보낸 2007년 개천절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 바로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이다. 한 해 전인 2006년에는 ‘한자의 특질을 활용한 LBH 교수학습법 개발’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한자 지식을 힌트로 활용하는 LBH(Learning by hint) 교수학습법을 후에 ‘속뜻학습법’이라 고쳤다.
2010년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속뜻학습 국어사전’을 편찬했다. 미국의 딕셔너리 프로젝트(동아일보 2013년 6월 25일자 A28면 참조)가 우리나라에도 로터리 같은 장학단체나 동창회의 호응으로 점차 확산됨에 따라 교육청과 학교, 학년, 학급 단위로 사전 활용학습이 널리 보급되면서 이 사전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선생님의 말씀과 아이들의 질문을 경청한 결과가 이토록 클 줄은 나 자신도 미처 몰랐다. 고인이 된 연민 스승님의 명복을 빌면서 경청의 힘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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