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자마자/창 앞에서 문득 차를 끓이노라/목을 축이니 오장의 열을 다스리고/뼈에 스미니 뭇 병기(病氣)가 사라지네’ ―목은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서
한반도의 차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중국에서 처음 소개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격적인 재배는 흥덕왕 3년(828년)부터다.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 차 문화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8월 24일까지 열리는 경기도박물관의 특별전 ‘차, 즐거움을 마시다’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20일 열린 관련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김성환박물관 학예팀장의 ‘고려시대 차 정책의 운용과 문화’와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조선시대 차 문화의 전개와 특징’을 통해 이를 요약해보자.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차는 큰 의미를 지녔다. 신라 때부터 이어진 다례(茶禮)는 정부와 사찰의 주요 의식이었다. 왕실엔 차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공식기구도 있었다. 명칭은 ‘다방(茶房)’이라 했다. 다방은 차를 즐기는 왕과 최고위층을 직접 모시며 국가의례까지 관장하니 영향력이 상당했다. 충선왕(1275∼1325)은 맘에 드는 다방의 하급 벼슬아치를 파격 승진시키기도 했다.
고려에서 차는 상류층에나 허락되는 호사였다. 왕실과 귀족은 하루 3번 ‘다시(茶時)’란 티타임을 즐겼다. 그들이 소비하는 대량의 차를 대야 하는 민초의 고난은 무지막지했다. 차밭 수확량이 모자라면 겨울에도 야생 찻잎을 찾아 산을 헤맸다. 고려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차를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자 피땀”이라고 비난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 차가 냉대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태종은 1416년 “제사에서 차를 빼고 술과 감주를 쓰라”는 조칙을 내렸다. 다방도 왕실의 채소류를 관리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박 소장은 “차가 불교와 밀접한 데다 여말 백성을 괴롭혔단 인식이 조선에서 ‘차의 퇴출’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런 인식이 바뀐 건 후기 실학자들의 공이었다. 특히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했다. 다산은 “전국 각지 방치된 차 산지를 되살려 중국과 교역해 실리를 얻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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