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15> 첫 외국인 바둑학 박사 트링스 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5일 11시 24분


외국인 1호 바둑학 박사 다니엘라 트링스씨.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지 8년 만에 학위를 딴 그는 “한국에서 계속 바둑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용인=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외국인 1호 바둑학 박사 다니엘라 트링스씨.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지 8년 만에 학위를 딴 그는 “한국에서 계속 바둑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용인=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안녕하세요"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던 벽안의 독일 처녀가 8년 만에 명지대에서 박사학위, 그것도 외국인 바둑학 박사 1호가 됐다. 독일 베를린 출신의 다니엘라 트링스 씨(37). 그는 24일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명지대 자연대캠퍼스 바둑학과 세미나실에서 열린 박사 학위 심사과정을 통과했다. 그는 명지대 바둑학 박사 3호이자 첫 외국인 바둑학 박사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트링스 씨는 "4년 동안 박사 학위과정을 밟고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학위논문 제목은 '국제 아마추어 바둑대회의 참여 동기와 이벤트 평가에 대한 다중 분석'. 유럽바둑콩그레스, 미국바둑콩그레스, 국무총리배바둑대회, 김인국수배 등 4개 대회에 참가한 아마추어들의 참여 동기와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한 논문이다. 한국말은 유창하지만 논문은 영어로 썼다. 지도교수는 바둑학과 김진환 교수.

그는 논문을 쓰기 위해 2012년 유럽바둑콩그레스, 2013년 미국바둑콩그레스 등 4개 대회에 참석해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왜 참가했는지와 바둑대회 내용이나 이벤트 등에 대한 만족도를 물었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질문 내용이 좋다. 나중에 연구 결과를 알려 달라"고도 했다는 것.

트링스 씨는 "미국과 유럽대회는 친목과 대회 만족도가 높지만 숙박과 음식값이 비싸다는 지적이 있었던 반면, 국무총리배는 스케줄이 빡빡하고 프로 기사의 복기나 지도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인국수배는 비교적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주최 측은 친목을 꾀하고 바둑을 두면서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논문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아마대회에 참석하다보니 바둑참가자들이 '왜 참가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행 연구가 없기 때문에 직접 발로 뛰는 게 힘들었지만 그 또한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스트레스 탓인지 한번 쓰러져 병원신세를 진 적도 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2006년. 바둑을 알게 된 지 18년 만이다. 그는 11세 때 "소설에서 본 바둑이 좋았다"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둑동호회에서 함께 바둑을 배웠다. 어머니는 베를린바둑협회 부회장까지 지냈다. 그는 배운지 얼마 안돼 꽤 실력이 늘었고, 고등학교 때는 주변에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1999년과 2000년, 2004년, 2005년 독일 여자 바둑대회에서 4차례나 우승했다. 아마추어 5단 정도의 실력.

뤼네부르크대 환경과학 석사학위를 받고 카셀대 연구조교로 있으면서도 초등학생들이나 모임에서 바둑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베를린에서 바둑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바둑 보급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대회에서 알게 된 명지대 바둑학과 친구들도 생각났다. 바둑 보급을 위해 좀더 체계적으로 배워보자고 한 게 한국으로 오게 된 동기였다.

양재호 바둑도장에서 배우다 명지대 바둑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도장에서는 헝가리에서 바둑 유학을 온 코세기 디아나 씨(32·현 한국기원 프로 초단)와 한두 달 함께 배우기도 했다. 그는 처음엔 2년만 한국에 있을 생각이었으나 석사과정 2년까지 모두 4년을 마쳤다. 그동안 바둑 학원이나 방과 후 바둑교실에서 외국인과 한국 학생들을 상대로 바둑을 가르쳤다.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수강생들의 반응이 달라진다. 예컨대 강하게 가르치면 금방 그만두는 경우가 많지만 부드럽고 즐겁게 가르치면 배우는 것을 기뻐하고, 나 자신도 즐겁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 같다."

그러다 그는 국가장학금을 받고 4년 동안 명지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게 됐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이때부터 일취월장했다. 물론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어 바탕은 충분히 마련됐다. 그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뎠을 때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밖에 몰랐다. 얼마 뒤에 한 선배가 "'배고파요도 필요한 단어'라고 가르쳐 줬다"며 웃었다.

트링스 씨는 한국의 음식과 산을 좋아한다. 한국 음식은 못 먹는 게 없고, 청국장과 추어탕까지 좋아한다. 또 등산 마니아다. 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동호회에 가입해 "북한산 관악산 월출산 설악산 등 웬만한 산은 다 가봤다"며 "지리산을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뒤 "한라산도 가봤어요"라고 추가했다. 탁구와 자전거도 좋아한다. 박사과정 때도 집에서 2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찜질방도 좋아해요"라며 웃는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한국에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 싶고, 학문적으로 한국 바둑을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 학생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며 이번 학기 학부 학생들에게 '바둑평가론'을 강의했다. 강의를 들은 박한솔 씨(바둑학과 4년)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알 때까지 가르쳐줘야 직성이 풀리는 꼼꼼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트링스 씨에게 "한국에 온지 8년간의 결실을 오늘 얻었는데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쉴 수가 없다. 논문 발간해 제출하는 등 2주 정도는 바쁠 것 같다(웃음)"고 했다. 그러더니 "그동안 거의 두지 못했던 바둑을 두고 싶다"고 말했다.

용인=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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