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그저 한 명의 무명 연기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로 와서 ‘오로라’가 되었다. 이제 그는 배우 전소민으로 불릴 것이다.
지난해 말 숱한 화제를 뿌리며 1백50부작의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가 막을 내렸다. 20%가 넘는 시청률도 그렇지만 화제성 면에서 2013년 방영된 드라마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주인공 오로라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주인공을 연기한 무명 배우는 오로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새 작품을 준비 중인 오로라, 전소민(28)을 만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오로라는 간 데없고, 미소 띤 눈빛이 유난히도 예쁜 소담한 전소민이 오롯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로라의 옷을 벗다 전소민은 6월 21일 첫 방송된 SBS 주말드라마 ‘끝없는 사랑’ 촬영으로 한창 분주하다.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한없이 순수하고 여린 소녀 감성의 김세경을 연기하고 있다. 어디서든 할 말 다하는 도도한 오로라에 비한다면 큰 변신이다. 전작의 무게는 머리카락처럼 쉬 잘려나가는 것이 아니지만 조급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저에게 ‘오로라 공주’는 로또만큼 큰 행운이었어요. 드라마가 끝났으니 벗어버려야 할 옷이기는 해요. 하지만 드라이클리닝을 해서 고이 걸어놓아야 할 소중한 옷이죠. 이제는 새로운 옷을 입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오로라 공주’는 데뷔 10년 만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패션 잡지 전속 모델로 연예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4년 MBC 시트콤 ‘미라클’로 연기자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에덴의 동쪽’ ‘조선X파일 기찰비록’ ‘정글피쉬2’ ‘사랑하길 잘했어’ ‘로열패밀리’ 등에 출연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늘 그의 몫이 아니었다. 지칠 법도 했지만 그는 길었던 무명의 시절이 어둡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무명 시절은 견딘 것도 버틴 것도 아니었어요. 힘들었지만 ‘자연스러운 시간일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믿음이 있었어요. ‘난 잘될 거야’ 그런 믿음이 아니라 ‘연기를 해야 내가 행복할 거야’ 하는 믿음요. 어떤 일을 해도 힘이 들 테고, 그럴 거라면 제가 행복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에게 지난 시간은 작은 역할이 주어져도 감사하고 연기를 할 수 있음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물론 그에게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로라 공주’ 오디션을 보기 직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학교(동덕여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도 돈벌이를 못 하니까 부모님께 죄송하고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창 고민하던 때 기적처럼 ‘오로라 공주’에 캐스팅이 됐죠.” 1000:1의 경쟁률을 뚫기까지 오디션만 수십 번을 봤고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비록 ‘막장드라마’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오로라 공주’는 전소민에게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큰 역할을 맡으면서 제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연기의 깊이와 넓이를 고스란히 느꼈거든요. ‘아,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죠. 처음에는 눈물 연기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겁이 났어요. 카메라 앞에 서면 무섭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일 못하던 걸 만날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조금씩 극복하게 됐죠.” 캐릭터와 스토리는 들쑥날쑥했지만 전소민은 나름의 연기력으로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는 오히려 “논란이 없었다면, 연기력의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라며 “아직은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말 ‘오로라 공주’로 ‘MBC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일일드라마 주연을 맡아 신인상까지 받은 배우로서 다음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있을 터. 하지만 그는 차기작에서 굳이 주연을 고집하지 않았다. ‘끝없는 사랑’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황정음, 류수영, 정경호의 굴곡진 인생을 그린 드라마다. 전소민이 연기하는 김세경은 극 중에서 국무총리의 딸로 세상 물정 모르고 겉과 속 모두 아름다운, 정경호(한광철)의 짝사랑을 받는 역할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조연이다. “일일드라마 주연을 했으니까 다음 작품에서도 주연을 해야 한다거나, 더 큰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연기를 계속하는 게 목표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욕심은 없거든요. 쉬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신인상을 받으면 그때부터가 시작일 거다’ 말하곤 했는데, 정말 그래요. 뭔가 이룬 느낌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한 신인, 전소민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은 ‘오로라 공주’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이 끝난 후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광고도 몇 편 찍는 등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넘치는 기대도, 욕심도 내려놓고 그저 자신에게 또다시 역할이 주어졌다는 데 감사할 뿐이다. “저 또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사람들을 봐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저의 노력이 비춰질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래서 섣불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죠. 며칠 전 촬영을 하다가 기본적인 것을 놓친 적이 있었어요. 연기를 10년이나 했는데 이런 것도 놓쳤나 싶어서 정말 한심스럽더라고요. 누구나 완벽하진 못하지만 그중에 더욱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이것만큼은 분명해요. 연기를 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해요.” 신인 시절 그의 꿈은 소박했다. 할머니가 보실 수 있게 일일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었고, 신인상만큼은 꼭 한번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꿈이 이제 모두 이뤄진 셈이다. 더불어 최근에는 자신이 힘을 보태 부모님을 모시고 이사를 했다. “더 벌면 좋겠지만 지금도 꽤 근사하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예뻤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남동생은 헬스 트레이너, 또 자신은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 부모님에 대한 마음도 애틋했다. “대학 입학 실기 시험을 볼 때, 예쁜 옷을 입고 가고 싶어서 옷을 사달라고 투정을 부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빳빳한 카탈로그에서 책장마다 꽃힌 1만원씩을 빼서 주시더라고요. 제가 대학 가면 입학 선물 사주려고 어머니께 받은 용돈을 아껴 모으신 거였요. 예쁜 옷 입고 시험보라고 그 돈을 주시는데, 너무 속상하고 죄송했어요. ‘내가 철이 없구나, 부모님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새침한 첫인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소민에게서 소박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가 꿈꾸는 미래 또한 화려하지 않았다. “연기를 하며 만난 선배님들이 ‘나이가 들면 더 예뻐질 얼굴’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너무 감사해요. 나이가 들어도 그때만이 가질 수 있는 멋으로 계속 배우 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거든요. 물론 지금도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더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해보고 싶죠. 특히 로맨스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거든요. ‘로맨스가 필요해’가 시즌 10까지 가면 저에게도 한 번쯤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요?(웃음)” 전소민은 배우로서의 성공이 “하고 싶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쉬 포기하지 않는 그의 단단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신인 시절 꿈을 하나하나 이뤄나갔듯 미래의 소박한 꿈 또한 하나하나 이뤄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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